무구수필

[무구수필] 등산의 맛

2023.11.30 | 조회 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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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등산을 가기로 한 토요일 전날 밤부터 나는 들뜬 준비를 했다. 내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니, 산에서 먹는 점심만큼은 직접 준비하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먼저 집 근처 제로웨이스트 카페에 가서 집에 없는 용량이 큰 보온 텀블러를 두 개 빌려왔다. 며칠 전 사뒀던 무와 마른 멸치 여러 마리를 넣고 푹 끓여 육수를 낸 다음, 간장으로 살짝 간을 한 어묵탕을 담아가기 위해서였다. 길거리 포장마차나 분식집에선 다른 메뉴에 밀려 양껏 먹지 못했던 어묵 국물을 이번에는 잔뜩 싸가고 싶었다. 가을날, 몇 시간의 고된 등산 후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어묵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킬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신이 났다. 곁들일 음식으론 당근 볶음과 청양고추 어묵볶음을 각각 넣어 말아둔 꼬마 김밥 두 종류, 집에서 직접 담근 얇은 단무지, 그리고 연겨자를 간장과 식초에 타서 알싸한 맛을 더한 만능 소스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음 날 아침을 기다렸다.

 

이번 등산 약속을 잡기 전부터 나는 광주에 왔으니 조만간 무등산을 오르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여보, 혹시 무등산을 동네 뒷산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 얘길 듣던 남편은 무등산을 가벼운 등산 코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한마디 했다. 무등산은 실제로 지금 우리가 사는 집 대문 밖에서도 바로 보이는 동네 산이긴 하다. 나는 괜히 오기가 생겨 더욱 자신만만한 태도로 등산 가자며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다섯 사람. 친구들과 오전 아홉 시쯤 증심사 쪽 등산로 입구에서 만났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무등산을 몇 번 올랐던 경험이 있어서 나는 자연스레 사람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다만 나는 무등산이 얼마나 크고 높은 산인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산길을 타박타박 걷다가, 커다란 바위 언덕을 성큼성큼 오르기도 하고, 벌써 말라서 바스러지는 낙엽 더미 위를 발로 헤치며 걸었다. 누군가 이미 잘 정돈해서 이곳이 길이라고 친절히 안내해 주는 등산로를 따라 앞으로, 앞으로, 위로, 위로 나아갔다. 모든 곳이 초행이었던 나는 중간중간 멈춰서서 아직은 덜 물든 나뭇가지와 이파리들, 그리고 나무와 나무가 모여 만든 가을의 숲을 바라보았다.

자신만만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쉽게 지쳐버렸다. 역시 무등산은 그냥 동네 뒷산은 아니었다. “나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못 오겠어, 우리 점심은 언제 먹어?” 생각보다 고된 등산길에 자꾸만 남편의 배낭에 넣어둔 어묵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산을 오르니 몸에 열이 올라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가 금세 바람이 불어 식어서 살갗이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기능성 소재 티셔츠 위에 걸쳐 입었던 얇은 점퍼를 입었다 벗기를 반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무등산을 혼자서 여러 번 오르내린 경험이 있던 남편은 가장 체력이 약한 사람의 속도를 맞춰 산을 오를 줄 알았다. 아마도 나의 상태를 봐가며 속도 조절을 해서 그랬는지 평소엔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는 중머리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열 한시가 넘어있었다.

중머리재에 있는 벤치의 빈자리를 겨우 찾아 자리를 잡고, 대망의 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었다. 어젯밤 미리 말아두며 몇 개 집어먹었던 것만 못했지만 차가운 꼬마김밥은 간이 잘 맞았고, 거기에 뜨끈한 어묵 국물을 마시니 음식이 술술 넘어갔다.

우리 말고도 맑고 시원한 주말의 가을 날씨에 이끌려 온 등산객이 많았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내렸다. 이곳이 해발 617m 중머리재라는 표지석 앞으론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단체 기념사진을 찍은 뒤, 다음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차에, 남편이 중봉까지 올라가 보겠느냐고 제안했다. 다른 친구들은 이후 일정이 있거나 체력 부족으로 먼저 하산하고, 남편과 나는 데이트 겸 조금 더 올라가기로 했다. 분명 중머리재까지 올라오기 전에는 다시는 안 오겠다고 다짐했던 무등산이었는데, 김밥을 먹어서인지, 어묵 국물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풍경 때문인지, 더 올라갈 수 있겠단 자신감이 붙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중봉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중머리재에서 중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동안 올라왔던 길보다 훨씬 가파르고 덜 다듬어진 느낌이었다. 커다란 암석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한 등산로가 인상적이면서도 오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뒤돌았을 때 눈에 담기는 풍경이 달라졌다. 점점 사람들은 줄어들고 한적한 공기가 느껴졌다. 탁 트인 시야와 저 멀리 옅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 머리들도 보였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올라왔을 때, 중봉에 도착했다. 중봉 표지석 근처에도 곳곳에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 각자의 방식대로 쉬고 있었다. 중머리재보다는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사람이 이곳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남편과 함께 표지석 앞에서 인증 사진도 찍고, 근처 암석에 걸터앉아 쉬기로 했다. 중머리재에서 친구들과 헤어지며 받은 귤 한 알을 맛있게 나눠 먹었다. 새콤달콤한 귤 맛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보온병에 남아있던 어묵 국물을 마저 다 마시고, 하산했다.

 

올라왔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오를 때보다 심리적으로는 훨씬 편하지만, 체력적으론 더 많은 힘을 요구하는 것이 내려가는 일이기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신경 쓰며 걸었다. 중봉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내려가는 내내 어깨가 한껏 올라간 기분이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혹시 중봉까지 올라가세요? , 전 거기 방금 올라갔다 왔는데, 헤헤.” 체력이 조금 더 남았더라면 내려오는 길에 마주쳤던 등산객들에게 이렇게 실없는 말을 건넸을지도 모른다.

내려오며 보는 풍경은 올라갈 때와는 사뭇 달랐다. 꺾인 나뭇가지나 오래전 쓰러져 누워있는 나무, 사람들이 자주 오고 가며 붙잡아서 반질반질해진 나무 몸통의 질감. 어떤 곳은 딱 보기에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 길처럼 보였는데 옆에 다른 길이 하산 방향이라고 따로 적어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잘못된 길을 들어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구간인 것 같았다.

 

우리가 목표했던 원효사 출입구에 도착해서, 작년 여름에 혼자 버스를 타고 올라왔던 1187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남편과 나란히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을 흘려보내며 집으로 향했다. 전날부터 신경 쓰이던 비 예보는 엇나간 줄 알았더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조금씩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졌다.

아침 아홉 시에 만나 집에 돌아오니 오후 세 시가 훌쩍 넘었다. 꽤 오랜 시간 땀도 흘리고 온몸에 얼얼한 근육통도 느껴졌다. 찝찝하고 피곤하지만 개운하고 상쾌하기도 했다. 다음에 또 한 번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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