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수필

[무구수필] 11월 19일

2024.12.01 | 조회 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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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던 만남이 성사됐다. 언제부터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있냐고 물어오면 나는 망설임 없이 L 작가님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작품은 최신작이 나올 때마다 챙겨서 읽고, 한참 전에 나왔던 작품들도 하나씩 야금야금 사 모았다. 나는 그의 글을 교과서처럼 꼼꼼히 여러 번 읽었다. 그를 존경하고 동경했다. 나는 고심 끝에 L 작가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선물처럼 답장이 왔다.

그가 제안한 만남 장소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일식 카레집이었다. 식당에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아 몇 번이고 남편에게 묻고 또 물었다.

만나면 대체 어떤 말을 꺼내야 하지?”

가면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올걸, 당신이 좋아하는 L 작가님이잖아.”

사실 그를 실물로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 달 전, 요즘 일하고 있는 책방에서 그를 특강 강사로 초청했다. 그때 처음으로 만났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내가 가진 그의 책 여러 권을 챙겨가 사인을 받았다. 그런데도 따로 한 번 만나기를 소망했던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그 식당에서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어딘가 바쁜 눈치였다. 그는 서둘러 돌아갔고, 나는 그에게 시간을 내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만남이 끝났다. L 작가와 대화했던 두 시간의 결론은 허무했다.

 

그는 나에게 맞는 말만 했다. 마냥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점 표정이 굳어갔을 것이다. 그 상태로 집에 바로 돌아갈 수 없어서 남편과 함께 카페에 갔다. 카페에서 지난 두 시간의 대화를 복기하다가 툭, 하고 무엇인가 끊어졌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대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나를 너무 깊이 찔렀다. 마치 대학생 시절 교수 면담을 하고 나온 기분이었다.

내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아무 사람을 붙잡고도 들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조언은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잔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그를 통해 듣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인생의 선배이자 작가의 길을 가고 있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듣고 싶었는데, 그는 나를 작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작가로 사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올 리가 없었고, 독립 출판을 한다고 하니 제대로 된 출판사에 취직해서 일을 좀 배우란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지난달 출간한 내 책을 선물로 그에게 건넸을 때, 그는 표지를 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만들면 책이 팔려요? 책을 책처럼 좀 만들면 안 되나....”

 

내가 작가로 안 보이나, 내가 작가가 아닌가? 나는 쉽게 자기 의심에 빠졌다. 그가 대단하고 유명한 작가라는 이유로. L 작가는 글을 잘 쓴다. 국내의 유명한 문학상 수상 이력도 많고,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다고 한다. 그 사실을 빼고도 나는 그의 책들을 읽었고, 그의 글에서 그 사람이 읽힌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기대가 컸기에 그만큼 실망도 컸다. 그가 했던 말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L 작가가 나에게 말하기 이전에 이미 내 안에서 몇 번이고 묻고 답하기를 반복했던 말이어서, 어딘가 아주 익숙하고 낯설지 않은 말들이었다. 자기 의심의 말들. 그렇다면 나는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인가. 무엇을 기대한 것인가. 유명한 작가인 L의 인정? 글을 잘 쓴다는 칭찬? 가능성이 있으니 힘내보라는 말?

 

아무리 외부에서 인정해도 내부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그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을, 이미 내 안에 있는 기준과 마음, 선택과 책임을 떠올렸다. 나에게 할 말이 있으므로 계속 글을 쓰겠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것. 자기 의심과 씨름하는 것조차도 결국 나의 몫이었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물으며 확인받고 인정받고자 애써도 내 안에 샘솟는 자기 의심과는 아무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 나의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며, 나는 앞이 잘 안 보여도 계속 내 길을 찾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L 작가와의 만남이 좋은 경험이었다고 정리했다. 다만 그가 했던 말이 그대로 맞는 말이 되도록 놔두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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