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 그것을 엄마와 아빠는 보았고 기억한다. 결혼하라는 주변의 온갖 잔소리에 시달리던 송자와 성민. 그 둘은 피아노 학원에서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에겐 금세 아이가 생겼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엄마와 아빠가 되었다.
처음으로 받아낸 생명이었던 나는 그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핏덩이처럼 붉은 신생아, 나를 안아 들고 젖을 먹이고 토닥이고 업어 재우던 그때. 그 시절에 송자와 성민은 아마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나는 워낙에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아기여서, 뒤통수가 바닥에 닿기만 해도 금방 울어 재끼는 바람에 늘 아빠가 나를 업어 재웠다고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주 우는데 이유도 알 수 없어 답답했을 그때에도, 송자와 성민은 행복했을까? 그들은 이후에 딸을 넷이나 더 낳았다.
결혼을 준비하며 눈앞에 당장 보이는 해야 할 일들도 정말 많지만, 그동안 굳이 꺼내두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던 관계의 문제들도 수면 위로 마구마구 드러나는 것을 본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네 명의 여동생까지 한 명도 남김없이 관계를 짚고 섭섭함과 속상함이 드러나고 나니 마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가족이란 건 대체 뭘까?
때로는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너무 편하고 가까워서 저지르는 실수와 무례가 있다. 오히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 깍듯이 챙겼을 것을 가깝다고 느끼니 손쉽게 잊거나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워도 나와 너는 서로 다른 각자의 존재인데, 그 사실을 망각하기 참 쉬운, 가족이라는 관계. 그래서 많이 미워도 하고, 싫어도 하다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 나의 사랑하고 미워하고 애틋한 가족. 참, 이게 뭘까 싶다.
어쩌면 그게 그때의 나의 상태에선 최선이었을 수도 있는 건데 그것이 상대방에겐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속상함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마음이 명쾌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섣불리 마음의 불편함을 지워내지 않기로 한다. 그 불편함을 가지고 살아야 쉽게 잊지 않을 것 같아서. 불편함이 느껴질수록 반성하고 다짐해야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그렇고, 네가 그런걸. 지금 당장 다 뜯어고칠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거리감이다.
나는 결혼을 한다. 내가 나고 자랐던 가족 구성원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가족을 이루기로 했다. 이제 나의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엄마와 아빠의 이름, 그 밑에 줄줄이 적혀 나왔던 나와 동생들의 이름이 아닌, 나와 남편, 두 사람만 찍혀 나오는 단출한 구성의 종이가 나온다. 두 사람 이름 밑의 여백이 후련하기도 하고, 어딘가 어색하고 아쉽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간다. 멈춤도 되감기도 없이. 잠시 기다려 주는 일도 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지나온 길에 나의 선택과 결정들을 보면 후회도 많고, 아쉬움도 많다. 그만큼 그리움도 짙다. 그래, 결혼이란 이런 거구나. 새삼스레 관계를 되짚어 보며 손가락을 접었다 풀었다 무언갈 수를 헤아리기도 하다가 결국엔 양 손바닥을 툴툴 털어내며 고민을 멈춘다. 그래, 내가 누군가에게 항상 좋기만 한 존재였을 수 없다.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한편으론 그 이상으로 깊이 나를 자책할 필요도 없다. 나에게도 새로 기회를 주자. 앞으로 더 잘할 기회. 좀 더 성숙하게 관계를 돌볼 줄 아는 기회.
나를 쉽게 용서하고 기회를 주며 핑계를 대는 모습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바라는 것은 내가 나에게 관대해지는 만큼,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것 이상으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더욱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나의 작은 실수들도 용서하기로 했던 것처럼, 나와 가장 가깝고, 밀착되어 있던 사람들에게도 더욱 그런 사람이 되기를.
쉽게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고, 각자의 때가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면. 어김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나마 조금 덜 슬프지 않을까.
조금 더 상냥하게 말하고, 친절을 베풀 걸 하는 후회를 남겨두고, 나는 이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한다. 만약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그때의 나를 지금보단 덜 다그쳐야지. 조금만 혼내고, 다독여 가며 다시 도전해 봐야지.
가까울수록 더 쉽게 멀어지는 것 같고, 멀기 때문에 더 편하게 속마음을 꺼내기도 하고. 이상하고도 자연스러운 관계의 세계 속에 나는 살고 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당연하지, 하다가도 때로 속상하고 아쉽다. 그럴 땐 야속했던 시간이 약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걸, 어느새 나도 배웠구나. 그래, 그렇다면 또 이 시간을 그저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잘 보내봐야겠다.
무언가 대단한 해결책이나 모두가 편안한 해소법 같은 건 모르더라도, 그냥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 앉아, 그곳을 함부로 이탈하지 않는 것. 마음속 바다에 온갖 감정의 풍랑이 일어도 쉽게 포기하지 말 것. 언젠가는 잔잔한 물결 위 윤슬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나는 날도 찾아올 테니까.
그저 지금은 가깝고도 먼 가족들에게 고마워해야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동안 나와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부족하지만 노력해 보겠다고. 그래,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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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onpulem8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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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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