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가정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주니어건, 셀 리드건, 팀장이건, 파트장이건, 혹은 임원이 된 기획자 여러분들. (늘상 그렇듯) 제출이나 납기가 매우 급하게 잡힌 프로젝트에 급히 착수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리더나 윗선, 혹은 의뢰인은 여러분에게 이 일이 이런식으로 시작될 수 밖에 없던 모든 연유와 정황을 장황하게 설명한 후, 그와 정반대로 매우 단순한 폭력(?)을 가합니다. "일단, 빠르게 검토할 수 있게, 예시가 될만한 아이디어 단위로 공유해주세요."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상황을 맞이하면 "대부분 참여자들의 머릿속에 방향이 있을 거다"라고 믿고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미팅의 주선자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각종 레퍼런스들과 경쟁 대상과의 비교우위를 가져갈만한 건들, 혹은 최근 유행하는 건들을 모아서 한 두차례의 회의를 거치고 바로 산출물 준비 단계로 착수하자고 합니다. 여기서, 한 두명의 실무 실행 중심 기획자들이나 의뢰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해온 경험이 있는 PM 레벨의 기획자들은 "이 의뢰인은 사실 이런걸 말하는거야"라는 믿음을 미팅 중 설파하며, 방법론의 갈래를 압축하기 위한 의견을 내곤 합니다. 갑론을박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냥 그 자리에서 가장 화끈해보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혹은 가장 화끈한 사람 한 명의 주도로 모든 내용이 뭉뚱그려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 스쿼드에서 가장 유능한 기획안 작성자가 이 아이디어들을 모아서 한데 뭉치고, 마치 처음부터 하나로 귀결된 전략적 사고에서 파생된 결과물인양 제안을 준비하게 됩니다. 혹은, (대부분 그렇듯) 3지선다나 4지선다를 요하는 꾸러미를 전달하고 말아버립니다. 주니어들끼리 착수한 캠페인 기획건이건, 아니면 회사의 C레벨이 똘똘 뭉쳐 진행하는 사업제휴 기획건이건, 광고/캠페인 마케팅 사이드부터 커머스, 심지어 국책이나 정책 사업에까지 이르기까지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런 과정이나 방식은 나쁜 걸까요? 이런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과물은 나쁜 걸까요? 정답은, 의외로, "아니다" 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나쁘다"라고 답하실 줄 알았겠지만, 그럴만한 근거가 전혀 없어서 그런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이런 프로세스로 진행되는 경우를 매우x1000000000 많이 겪었고, 또, 기획 청부업자로 회사를 운영하던 당시의 모든 기획이 사실상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매우 드라이하게, 시스템적으로만 말하자면 오히려 준비와 결정, 정산까지의 시간이 줄여져서 좋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즉, 이러한 과정과 방식 자체에 대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제게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대부분의 현업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아마 앞으로는 더더욱 압축된 조사과정의 리드타임, 더 압축된 의사결정 싸이클, 그리고 더 큰 사이즈의 결정을 요하는 건들에도 이런 방식의 기획 업무가 뉴-노멀이 될테니까요. 오히려 맞춰서 대응해야 할 영역입니다.
하지만, 네, 하시고 싶은 말씀과 첫 아티클부터 구독을 취소하고 싶은 이유를 잘 압니다. 이런 방식은 대부분의 기획자들이 조직과 업계에 정이 떨어졌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구독자분들 중에서도 이런 경험이 종종 있으실 겁니다. 프로젝트의 리더 내지는 결정권자의 레벨에 있는 분들은 "준비해온게 하나같이 쓸모가 없고 생각이 없어서" 조직에 정이 떨어지고, 실제 현업과 실무에 가장 깊숙히 개입한 PM 레벨의 기획자들의 경우에는 "다들 공부도 안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서 조직에 회의감이 생기고 떨어지고, 주니어 기획자들의 경우에는 "뭐 알려주지도 않고 하나같이 다 싫기만 하대?"라고 생각하며 업계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겨납니다. 그뿐인가요. 보통 이런 방식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검증된 조직은 이런 방식 '적임자'가 되어버려서, 마치 상시 TF처럼 이런 류의 프로젝트만을 반복하게 됩니다. 상시 대기, 긴급 착수, 다급한 피드백 과정과 정제되지 않은 의견들의 홍수는 고스란히 기획자 개인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되고, 결국 그 과정에서 슬프게도 대부분의 기획자들은 적극성을 가지길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방어적 기제를 발동시켜 소위 말하는 "받아쓰기"를 하고마는 수동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고 맙니다.
안 읽고 넘어가도 되는 김묵산 생각: 저는 더 나아가, 여기서 가장 슬픈 것은 여기서 파생되는 산업 전반에 대한 나비효과라고 생각합니다. 기획자라는 업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아직 사랑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던 사람들은 더이상 업에 깊게 개입하기를 포기하게 되고, 조직의 리더들은 그들을 불신하며 혼자 일하는 경향이 커지며, 결국 조직의 성장이 더디어지고, 의뢰인조차도 결국 혼자 일하는 것이 빤한 조직을 버리게 됩니다. 기획자 1인이 아무리 잘났다한들 우리 업의 특성상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은 감출 수 없으니까요. 결국,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조직에서는 기획업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습니다. 더 사소하고, 더 쉬운 일(쉬워 보이는 일)을 반복하고, 기획 조직은 결국 잡무를 대신 해주는 조직이 됩니다. 다른 부서의 실무자들은 이 온도차를 단박에 알아차리고, 타 부서간의 협업도 갑자기 갑과 을의 관계처럼 바뀌기도 합니다. 경영진들은 절대 눈치 챌 수 없고, 눈치를 채더라도 딱히 기획 조직을 챙겨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버려 두거나, 조직의 수장의 개인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결국, 조직은 와해되고, 불신은 쌓여갑니다. 만약, 이런 회사가 100개, 200개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광고/캠페인/마케팅 회사부터 AI회사, 건축업 회사, 무역 회사 등등 여러 영역에서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요? 취직도, 채용도 어려워질테고, (극단적으로) 혁신은 사라질 것입니다. 업의 혁신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가 내린 한두번의 선택이 내 다음 일자리와 일거리를 없애버린다니...그야말로 산업 전반의 재앙이라고 생각입니다.
[재앙은 막고, 위기는 기회로 만드는 법: 단계별로 질문을 던진다 - 착수 단계 / 회의 단계 에서 던져야할 마법의 질문 모음]
앞서 말했듯, 이러한 방식이 내포한 무시무시한 위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방식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아이디어부터 볼 수도 있고, 경험이 많은 누군가의 직관으로 방향을 압축할 수도 있습니다. 총책임자의 책임 권한에 맞추어서 압축할 수도 있구요. 즉, 먼저 이러한 의뢰를 받았다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스스로를 내면화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입니다.
[#1. 착수 단계에서 던져야할 질문 / 대상: 스스로에게]
1) 누가 이 프로젝트의 리더인가?
2)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3) 우리 조직은/회사는 어떠한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가?
4) 나는 이 프로젝트에 언제까지 집중할 것인가?
5) 아이디어의 여하를 떠나, 결국 이 프로젝트가 만들어내야할 가장 좋은 그림은 무엇일까?
이런 게 무슨 마법의 질문이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조차 안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생겨납니다. 특히 주니어라면, 이러한 실무상의 제약까지도 기획의 일부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좋은 기획자가 되기 위한 첫 시작입니다. 리더/경영진급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위와 같은 질문을 통해 가장 먼저, "아이디어만이 기획을 이끌어나가는 매개체가 아니다"라는 점을 아는 것, 그리고 "프로젝트 관리/운영까지도 기획이다"는 점을 아는 것, 회사도 경영 "기획"을 하고 있다는 점을 거시적으로 파악하는 내면화를 하게 되고, 나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떤 내용을 준비해가야 하는지에 대해 1차적으로 필터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질문
1) 누가 이 프로젝트의 리더인가?
2)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3) 우리 조직은/회사는 어떠한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가?
4) 나는 이 프로젝트에 언제까지 집중할 것인가?
5) 아이디어의 여하를 떠나, 결국 이 프로젝트가 만들어내야할 가장 좋은 그림은 무엇일까?
예시: 주니어/실무자의 경우
김묵산이 PM이다
PM이 정한 방향을 서포트한다
00팀의 상시 프로젝트를 수주한다
성사 후에도 내가 진행할 일인 것 같으니, 약 3개월이다.
매출이 막힌걸 힘들어하니 그 혈을 뚫어줘야 하는 것 같다.
예시: 리더/경영진급의 경우
000가 미션인 클라이언트 상무
상대의 의중을 팀에 잘 공유한다
수주는 거의 확정된 프로젝트인만큼, 실력 증빙이 필요하다
계약 전까지는 거의 100%, 이후에는 10% 개입을 목표로 한다.
지금의 제안팀이 이 업의 전문가가 되게 하여 그 팀의 상시 성장 업무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내용을 알고 준비하는 급한 회의와 그렇지 않은 회의는 그 퀄리티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점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리더진/경영진의 역할을 겸임하는 기획자라면 프로젝트 경영 기획에 준하는 디렉션을 주는데에 집중해야 하며, 미팅을 이끌어나가는 주선자나 MC의 역할을 해야합니다. 본인의 권위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채택되는 것을 "내가 여전히 기획도 리더네"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영진/조직장급의 기획자라면, 여러분이 실무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착각인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병목은 여러분에게서부터 발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상시 경계해야 합니다.
주니어/실무자의 경우에는 본인도 모르게 극단적인 진영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객관적으로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매우 적극적이거나, 매우 수동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며 그런 모습은 모두 티가 납니다. 경영진에게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한참 후배인 주니어들에게도요. 특히, 실무에 닳고 닳은 PM급 기획자들의 경우에는 이미 많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기 때문에 매우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방향을 선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4번과 5번의 질문에 대해 리마인드하지 않는한, 본인이 이 프로젝트에서 빠지는 방향이나, 개입이나 피드백을 최소화하는 방향을 자기도 모르게 우선시하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실제 의뢰인이 원하는 결과와는 거리가 멀더라도 그러한 방향을 "의뢰인의 진리처럼" 회의에서 푸시하는 경우가 잦고,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경영진이 아닌 "적극적인" 주니어들과의 마찰이 발생하게 됩니다. 적극적인 주니어 기획자들은 1번과 2번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3~5번의 질문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주니어 단계에서부터 꾸준히 하는 것이 결국 본인의 빠른 승진과 자리매김을 만든다는 점을 잘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이고(혹은, 하고 싶다고 나서고 싶은 일이고) 또한 내가 실행을 할 일인지를 물어보는 과정 또한 기획을 위한 리서치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만들어낼 가장 좋은 그림은 충분히 웹 리서치를 통해서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니어의 경우 1~5번의 질문에 대해 순차적으로 꼼꼼히 사전에 체크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안 읽어도 되는 김묵산 생각: 현업에서 다양한 회사를 경험해볼수록 이러한 경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굳이 비난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중에 퍼진 현학적인 기획법 책들, 누구누구의 생각법이니 하는 책들이 기획업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이러한 문제를 마주하면 "리드하라, 타협하지 마라, 개성을 가져라, 압도적인 기획을 내면 모두 납득한다"라고 가르치며 본인이 뭐 얼만큼 그런 상황을 뒤집은 천재였는지, 광인이었는지를 자랑하는데, 냉정하게 그런 방법은 그냥 저자 본인이 멋있어보이기 위해 쓴 무용담에 불과하지 기획자로 성장하는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본인의 권위를 본인의 실력으로 착각하는 경우, 혹은 상황적 특수성을 실력으로 착각하는 경우에서 이러한 답이 나옵니다. 실제 현업에서는 그러한 태도는 본인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자기만의 기획"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혀있는 기획법이 "대행"에만 한정인 것 같다고 느낄 수 있겠으나, 극단적으로, 당신이 "나라"를 하나 만든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의뢰주가 존재합니다. 곧 가지게 될 국민이지요. 문제를 해결하고 일이 되게 만드는 것이 기획이기 때문에, 기획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필히 우리가 어떠한 대상을 향해 기획을 하고 있는가를 명쾌히 정리하고 텍스트로 남길 수 있을만큼 정돈해야 합니다. 물론, 저런 천재적인 바이브와 주도자의 태도를 가지는 게 중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된다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게는 일단 당장 내일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는데데가 본인의 발전까지 가로막는 쓰잘데기 없는 곤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하더라도 결국 여러분은 최소 AI 내지는 최소 "검색"이라는 파트너, 더 최소로는 "뇌"라고 하는 파트너라도 가지고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즉, 1~5번의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어디로도 가지 못합니다. 그냥 그때그때 섬광처럼 떠오르는 척수반응을 기획이랍시고 내놓다가보면 나이와 경력이 쌓이는만큼 지혜가 복리처럼 쌓이지도 않고, 그저 뇌세포의 영민함이 떨어지는만큼 퇴보할 뿐입니다. 항상 질문을 합시다.
자, 착수단계를 지나서 회의를 맞이한 여러분들. 아무리 착수단계에서 충실히 준비했다고 한들, 갈 길이 많이 법니다. 누군가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매출을 올리고 싶고, 누군가는 의뢰인이 좋아할 만한 제안을 만들고 싶고, 누군가는 일단 내일까지 제출할 문서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기획업의 문제는 틀린 생각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옳은 생각을 가져오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첫번째 회의의 주제는 문제의식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의 아이디어 발표가 진행된 후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봅시다.
[#2. 회의 단계에서 던져야할 질문 / 대상: 주선자가 모두에게]
1) 주선자가 모두에게: 우리가 정말 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가?
2) 주선자가 모두에게: 우리의 기준점을 세 개를 정한다면 무엇인가?
3) 모두가 주선자에게: 우리의 해결 범위 내에서 그 셋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첫번째 질문보다는 세번째 질문입니다. 리더나 경영진급 기획자가 첫번째 질문만을 던지고 본인의 생각만 주루룩 읊는다면 이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들을 생각 없이 본인의 경험에 따라 모든 아이디어를 재단하거나(특히 PM들), 공부가 안 되어서/공유를 못 받았다는 이유로 첫번째 질문에 시큰둥해서도 안 됩니다. 위와 같은 질문에서 나와야할 답변의 모범적인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 1) 우리가 정말 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가? - A님과 B님의 문제 정의가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저는 B님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