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저번 편지는 재미있게 읽으셨을까요? 설 연휴에 이어 아이들 방학으로 저는 긴 시간 친정에서 휴가와 요양의 중간쯤인 생활을 하고 왔답니다. 아이들이나 저나 친정에서 아프길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걷고 쓰고 읽던 내 쉴 틈 없는 일상이 그립기도 했네요.
저번 뉴스레터를 보냈을 때는 전 부칠 준비를 마쳐놓고, 가장 가까운 카페로 뛰쳐나와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쥐어주고 다시 카페로 나와 초안을 썼답니다. 일주일만의 혼자만의 시간이었던 터라 끔찍하게 좋았어요.
이번 편은 어느 집이나 공기처럼 흐르는 티브이 속 프로그램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합니다. 명절 연휴와 티브이는 단짝이니까요.
12. 마흔 일기 / 연예인
아무튼, 무한도전
어느 집이나 거실에 티브이가 있는 집이라면 무의식 적으로 틀어놓는 고정 채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티브이 프로그램을 넘어 현관을 열면 풍기는 익숙한 집 냄새에 가깝다. 오래된 소파나 식탁 위 보리차처럼 이미 그 집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존재감을 뽐낸다.
시가에 가면 아버님 어머님은 주로 골프를 보신다. 사실 주방에 있을 때나 낮잠을 자러 안방에 들어가실 때도 틀어져 있으니 보신다기 보다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다는 게 더 맞겠다. 가끔은 야구나 배구일 때도 있다. 원래 경기가 그렇게 자주 있는 건지 운동 경기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시가에 가면 티브이만 틀면 봐야 할 경기들이 여지없이 진행 중이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함께 살던 외할머니가 친정집으로 오신 후 친정집에도 종일 티브이 전원이 켜져 있게 되었다. 여기는 스포츠 대신 오래전 사극 드라마가 재방되는 채널이 주를 이룬다. 이번 설에 갔을 때는 장희빈과 주몽이었다.
젊다 못해 어린 김혜수 배우가 장희빈으로 나오는 2002년 드라마였는 데 얼마 전 종영한 슈룹에서 중전으로 나온 모습이 떠올라 감탄하며 봤다. (티브이 속 잘 관리한 배우에게도 세월이 보이는 데 티브이 밖 나는 얼마나 늙었을까 잠시 아찔하기도 했다.)
우리 집의 경우는 밤에 자다 깨서 나와보면 남편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장군의 아들이나 태조 왕건을 보고 있다. 겨우 나보다 1년 먼저 태어났으면서 내 기억에는 흐릿한 사극을 보고 또 보다니 놀랍다. 드라마 재방을 안 할 때는 여지없이 타짜나 범죄와의 전쟁이다. 이제는 나도 대사를 외울 지경이다.
무의식적 내 채널 선택은 항상 무한도전었다. 놀면 뭐 하니 일 때도 있고, 런닝맨이나 식스센스일 때도 있지만 역시나 가장 만만한 건 무한도전. 웃기다거나 재미있다는 수준을 넘어 사람의 눈이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녹색 풍경을 보듯 무한도전은 그저 조용한 집 안에 적절한 시각과 청작을 채워주는 프로에 가깝다. 어느 야구단 팬에게는 파란색 피가 흐른다는 데 내 유전자 어딘가에는 분명 무한도전이 녹아있을 것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무한도전 빠’다.
내 자아를 형성하는데 큰 일조를 한 두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섹스 앤 더 시티이고 다른 하나가 무한도전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우정과 성공에 대해 꿈꿨다면 무한도전은 명확한 연애의 기준을 만들어 줬다. 무한도전을 보며 지내온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 길고 소중해서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접점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친구들이 이상형에 대해 떠들 때도 나는 종교가 다른 사람은 만나도 무한도전 안 보는 사람이랑은 못 사귈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웃으며 말했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척하면 척 그런 게 좀 있었으면 했다. 스키장 가면 터보의 스키장에서를 흥얼거리고(하늘을 봐 하얗게 눈이 내려와 자동 재생), 월드컵 하면 2002년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술은 준코에서 마셨으며, 토요일 저녁이면 무도 생방을 사수해야 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다행히 내 예능 코드에 함께 웃어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해서, 신혼 시절 우리는 토요일 저녁 작은 소파에 바짝 붙어 앉아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함께 무한도전을 시청했다. 지금처럼 언제든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1분도 지체할 수 없었다. 올림픽 경기를 기다리듯 경건하게 미리 치킨을 사가지고 와서 광고가 끝나기 전에 세팅을 마치고 앉아있었다. 우리 부부에게 함께 무한도전을 본다는 건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각자 평일을 잘 보낸 후 주어지는 토요일 저녁의 근사한 마무리이자 보상.
내가 유재석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무한도전이 끝난 후였다. 그때까지는 무한도전 프로그램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김태호 피디부터 하하, 광희, 양세형까지 출연진 전원을 공평하게 애정해 왔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폐지된 후에 갈 곳 없는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유재석의 뒤를 밟고 있었다. 유퀴즈부터 최근 유튜브 뜬뜬까지 유재석이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있는 날 발견한 후에야 내가 유재석의 팬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이가 크고 난 후에는 남편 대신 아이와 함께 티브이 앞에 앉아 팬심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된 후 이제는 동요가 아닌 가요를, 만화가 아닌 예능을 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실로 놀라웠는데 유치원 형님 반이었던 7살과 초등 1학년의 갭 보다 훨씬 더 컸다. 초등학교 1학년은 아직 유아 티를 벗지 못하고 학교에 적응하는 시기라면 2학년은 학교에 익숙해진 잼민이(어린이)가 마음껏 활개 치기 시작하는 때랄까.
우리 집 초2 잼민이는 아침형 인간이라 내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거실에서 티브이를 본다. 만화나 예능을 잘 보는 데 주로 벌거벗은 세계나 런닝맨, 대탈출이다. 이제 아기는 아니라는 걸까 다 컸네 싶을 때쯤 6살 여동생과 함께 티니핑의 새 시즌을 기다리는 걸 보면 아직 아기구나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참으로 폭넓은 취향이다.
온 가족이 함께 티브이를 볼 때는 아무래도 막내인 여동생의 취향을 주로 따라 만화를 보지만 아들과 단둘이는 우리의 접점인 런닝맨을 자주 튼다. 같은 프로를 보면서도 아이와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확연히 갈리는데 나는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하기 전 근황 토크 타임을 좋아하는 반면, 아이는 게임에 진심이다. 내가 런닝맨을 못 보고 지나간 주는 아이가 누가 우승을 했고 벌칙을 받았는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엄마 누가 일등 할 거 같아요? 누가 벌칙 받는지 맞춰봐요."
티브이를 보는 내내 아이의 관심은 게임 결과에 쏠려있다. 반면 나는 유재석이 어떻게 멤버들을 놀리는지, 멤버들의 한 주 동안의 근황이 어땠는지가 중요하지 사실 게임의 결과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속마음이야 그렇지만 함께 시청하는 아이의 들뜬 마음을 모른척할 수 없어서 함께 조마조마한 척 결과를 기다리는데 아이는 간절하게 유재석의 승리를 기원한다. 마지막 벌칙자를 결정할 때 유재석이 후보라도 되면 두 손을 모으고 ‘제발 제발....’ 눈을 꼭 감고 기도까지 하는 녀석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유재석이 벌칙을 면제받으면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환호성을 지른다.
"엄마! 벌칙 양세찬이에요! 휴 다행이다."
그 엄마의 그 아들인지, 그야말로 대를 이은 충성이 아닐 수 없다.
유재석이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을 찾아보면서도 내가 이렇게나 유재석을 좋아했었는지, 대체 왜 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무한도전을 오래 봐왔기 때문에 익숙하고 그리워서 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다 내가 왜 이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지 유재석과 전혀 관련이 없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보며 깨달았다.
그녀들이 떨리는 속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이유 있는 허세가, 그걸 채우려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매 회 심장을 두드렸다. 그런데 스우파를 볼수록 어딘가 익숙했다. 처음 스포츠 댄스나 봅슬레이에 도전한 후 울음을 터뜨렸던 무도 멤버들을 볼 때 함께 마음 졸이던 내 모습이 보였다. 코미디나 댄스에 관심도 없던 내가 왜 이렇게 대책 없이 팬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답을 알 것 같았다.
아,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모르는 영역에서 몸을 바쳐 뛰어들어 남김없이 불타오르는 사람들을 보는 걸 좋아하는구나. 유유자적 평화로운 일상이나 자연 속 캠핑 같은 한가로운 화면을 보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쓰러지고 깨지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이뤄내는 그 작은 성공에 함께 환호하며 기뻐하고 싶었다. 무난하고 조용한 내 삶에서 대신 티브이에게 바라는 건 그게 다였다. 다행히도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걸 해내는 사람이 있어서 아마도 나는 그의 팬이 되었나 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는 아무튼, OO 시리즈가 있지요. 저 역시 내가 그 책을 쓴다면 어떤 주제가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곧바로 떠오른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무한도전이었어요. 내친김에 글감별로 목차로 만들어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10편의 소제목이 나오더라고요.
현실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제 팬심을 담아 그중 한 편의 미리 보기처럼 생각하고 써보았답니다. 구독자님의 연예인은 누구일지 궁금하네요.
23. 1. 30.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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