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18. 마흔 일기 / 불혹

지독한 현실을 깨닫는 나이

2023.04.30 | 조회 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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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수정)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희정입니다.

허겁지겁 보내놓은 뉴스레터를 수정합니다.

세상에 5월이 된 줄 알고 새벽 3시까지 써서 보낸 글을 전송해 놓고 침대에 누웠더니 아직 30일 일 때. 얼마나 무서웠게요. 어쩐지... 와 어쩌다가... 를 반복하며 혼란스러운 밤을 보냈답니다. 결론은 그냥 제가 멍청했던걸로.

기다리신 분들께는 부족하지만 반가운 레터였길 바랍니다. 

 


 

18. 마흔 일기 / 불혹

지독한 현실을 깨닫는 나이

 

 

영화를 무척 좋아하지만 아직도 넥플릭스를 보지 않는다. 왓챠나 쿠팡 플레도 마찬가지다. 내가 영화를 보는 건 영화관이나 티브이에서 결제를 하고 보는 것이 전부다. 잠시 잠깐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까불던 고3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일요일 아침의 낙이 출발 비디오 여행이었던 사람이 넥플릭스를 안 보다니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거기다 <오징어 게임><더 글로리>를 보지 않은 것까지 밝히면 너 어디 절에 들어가서 사는 거 아니냐며 놀란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스마트 폰을 사용하게 된 이후 내가 책 보다 핸드폰을 더 오래 들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지만 무제한으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는 건 조금 겁난다. 글에서 또 한 발자국 멀어질 것 같아서.

 

영상에 거리를 두려는 습성 때문에 유튜브도 잘 보지 않는다. 구독하는 채널도 영화나 인터뷰 채널 몇 개뿐인데 설거지할 때 20~30분 틀어놓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스타그램이었다. 나는 인스타그램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시골에 내려오면서 나는 인스타로 세상을 봤다. 그 안에서는 여전히 연결된 느낌이라 좋았다. 현실은 서울에서 떨어져 나와 논밭을 걷고 있지만, 원하면 언제든 서울의 문화 행사나 전시 소식 따위를 알 수 있었다. 비록 갈 수는 없어도 여전히 그런 것들을 꾀고 있다는 것 만으로 덜 외로웠다.

 

인스타그램으로 육아도 했다. 동네에 친구는커녕 육아동지 하나 없이 아이를 키우던 나에게 인친(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며 생긴 친구)과 내 아이의 성장을 지켜봐 주는 랜선 이모들은 이웃이 되어주었다. 육퇴 후에 만나서 같이 밤마실을 갈 순 없었지만, 거실에서 어질러진 살림살이를 등지고 맥주 한 캔 따서 사진을 올리면 너나 할 것 없이 오늘은 나도 마셔야겠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며 비슷한 풍경을 담은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그놈의 인스타그램만큼은 쉬이 놓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 세계를 얕게 보고 쉬이 떠나는 사람들이 미웠다. 내가 여기에 얼마나 진심인지도 모르고, 인생을 낭비하고 자신을 포장하는 한심한 어플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야속해 서럽기까지 했다.

 

그러다 인스타그램에도 영상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나는 속무무책으로 당했다. 이제는 제 멋대로 추천하는 짧은 영상들을 보느라 말 그대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서럽다 욕했으면서) 왜 이딴 걸 찍어 올릴까 의아해하면서도 엄지손가락은 쉬지 않고 다음 영상을 보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잠깐 쉬려고 침대에 누워 릴스를 보고 있었다. 그럴듯하게 편집된 강연은 아무리 빨리 패스해도 어김없이 뜬다. 원래 말보다 글을 신뢰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확신에 찬 어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도 넘기려고 했는데 40이라는 숫자가 발목을 잡았다.(아니 엄지손가락을)

 

김미경 강사가 허리를 구부리고 약간 인상을 쓴 익숙한 자세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40대가 왜 우울한지 알아요? 10년 뒤가 기대되지 않기 때문에요. 성인이 되면 대학도 가고 연애도 하려고 열심히 공부하던 10대가, 오피스텔 얻어서 독립을 꿈꾸던 20대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남들처럼 살아야지 하던 30대가 40대가 되어보니 지독한 현실을 깨닫게 되더라고. 

혹하기 좋게 편집한 영상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40이고, 그 지독한 현실의 한복판에 서있으니까. 아니, 불혹이잖아.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나이가 40이라며, 나는 왜 이런 걸까.

 

내 인생에 첫 난관은 첫 아이가 찾아오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야 어릴 적에도 있었지만 화장실이 없는 집에 살 때도, 주방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똥 싸는 게 창피한 건지도 모르던 예닐곱 살 아이 일 뿐이었다. 비가 많이 와서 지하실에 있던 우리 집이 물에 잠기면 둥둥 떠다니던 커다란 대야를 타고 놀 수 있어 즐거웠던 철없는 어린아이였으니까. 그러니까 어릴 적 가난은 내가 아닌 부모님의 지독한 현실이었다. 나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런 집에 친구도 데려오고 주인집 아이와 줄넘기가 바뀌어도 눈치 없이 속상해 하는 아이였고.

 

오히려 내 인생은 지나치게 평온하다 생각했다.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이나 대단한 예술가는 될 수 없을 거라고. 그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온갖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던데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한 건지 한편으로는 불만이었다. 나도 좀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릴 적부터 이렇게 평범하면 안 되는 거잖아 속상했다. 원래 긍정적인 탓도 있지만, 내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내 생활을 평범이라는 범주 안에 들게 하기 위해 엄마가 내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었다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원래 자식들은 그런 법이다. 부모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

 

사실 서른 살에 첫 난관이면 꽤 늦은 거였다. 힘들어도 지금까지 잘 잘았으니 이제는 어른답게 내게 찾아온 불행에 맞설 법도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자주 많이 울었다. 임산부의 눈물은 조금만 방심하면 터진다지만, 그 원인이 호르몬이 아닌 내 불행 때문일 때가 더 많았다.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썼는데 거기엔 바라던 아이가 찾아온 행복과 출구 없는 불행이 뒤범벅되어 있다. 그래도 우주는 우리 가족이 나락으로 떨어져 발견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덕분에 간간이 웃었다.

 

두 번째 난관은 둘째 아이 5살 무렵이었다. 이제 좀 살만했는데, 이제 겨우 좀 살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애 키우는 게 지옥이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엄마라는 역할이 나에게는 전부였기에 형편없는 엄마가 될수록 내 가치를 잃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만큼, 엄마노릇이 버거워 힘들어하는 나를 견디기 힘들었다.

 

울고 싶을 땐 무작정 걸었다.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어도 마음이 아픈 것보다는 덜 했다. 그래서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울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다. 밤에도 무섭지 않았다. 설사 칼을 든 사람이 내 뒤를 바짝 따라와도, 내 어두운 마음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죽이려면 죽이라지. 새벽에 울면서 혼자 거리를 걷는 사람에게 두려운 것 따윈 없다.

 

누하동에 살던 신혼 때는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새벽까지 불이 환한 종로를 지나 사람 한 명 없는 새벽의 명동을 걷다가, 24시간 문을 여는 패스트푸드 점에 앉아서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면, 지갑이랑 핸드폰 없이 나왔다는 걸 깨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괴로울 때마다 걷는 것으로 버텼다.

 

신혼 집이였던 누하동 다음 집은 낯선 시골 동네였다. 고속도로 옆 허허벌판 가운데 있는 작은 아파트가 우리 집이었다. 등 떠밀리듯 서울을 떠나 내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진 집. 거기에서는 더 이상 걸을 곳이 없어서 같은 곳만 뱅뱅 돌았다. 힘들면 나가서 걸어야 하는데 어디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외딴 동네라 별 수 없었다. 시골에 내려오면 한적한 숲길을 마음껏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시골살이를 모르는 서울 촌년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좁은 수조관에서 빙글빙글 돌며 평생 살아야 하는 돌고래 같았다.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고 그만 끝내는 돌고래가 있다고 예전에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내 심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럴 때는 터미널로 갔다. 터미널로 들어오는 버스 중에 아무거나 골라 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버스마다 올라타는 상상을 했다. 밤이면 영업이 끝난 터미널에 앉아서 세상이 망한 사람처럼 울었다. 불구덩이 속에 구조대가 나만 남겨두고 철수한 것 같았다.

 

40살이 되어 맞이한 이 현실을 뭐라고 해야 할까. 확실한 건 10전 전의 내가 기대하던 현실은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고 수조에 머리를 박은 돌고래 처럼 살 수도 없다. 10년 전에 기대했던 것 중 유일하게 이룬 것이 두 아이들이었으니. 엄마의 불행이 어린 나의 불행이 아니었던 것처럼, 딸이 창피하지 않게 신문지에 싼 똥을 재빨리 치우며 뒤돌아 울어야 한다.  

 

첨부 이미지

 

 


 

레터를 쓰면서 너무 우울하면 신세한탄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래도 인스타에 위로가 되었다는 댓글이 있어서 안도했습니다.

5월에는 웃으며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볼게요.

 

23. 4. 30.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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