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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LUV

#18. 미어지다, 마침맞다

2025.05.06 | 조회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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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미어지다

: 팽팽한 가죽이나 종이 따위가 해어져서 구멍이 나다.

: 가득 차서 터질 듯하다.

:(비유적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심한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다.

 

  • 단어를 찾은 곳

외식을 하기로 한 장소는 이모네 수준에 맞게 호텔의 정통 프랑스식당이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어디로 갈까 많이 망설이다 정한 곳이라는 이모의 부연 설명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외식은, 물론 그것마저 일 년에 몇 차례 불과한 일이지만, 망설임 한 번 없이 단호하게 돼지갈비집이었다. 고기 타는 연기가 식당 바깥까지 자욱하고, 맛 좋기로 소문났다는 어머니의 자랑처럼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먹는 일도 노동이었다. 쉴 새 없이 고기를 뒤적이고, 연기를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볼이 미어지게 싸 넣은 상추쌈으로 격렬한 입 운동이 불가피한 거기. 남동생과 나와 어머니는 전쟁터 속의 병사들처럼 묵묵히,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 돼지고기와 싸우다 거의 지쳐서 식당을 나오곤 했었다.  

양귀자, 모순, 31쪽

  • 나의 단어라면
건물이 종잇장처럼 무너진다. 뭐든 무너질 땐 종잇장 같은 거야 옆에서 그랬다. 우리는 손을 잡고 멀리서 건물을 바라 보았다. 무너지는 건물은 나중엔 연기만 가득 했다. 들고 있던 커피를 홀짝였다. 아름다웠다. 양심 없다고 생각했다. 먼지바람도 양심이 있는지 아름답지 않으려고 잔뜩 퀴퀴한 회색인데. 나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저 튼튼한 게 나팔거리는 종잇장보다 못해지는 일에 왜 아름다움을 느끼는지. 누군가에겐 절박하거나 혹은 강렬하게 아픈 순간에는 응당 가져야 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은 때로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감정과 감상 어느 사이에 있으면서 두둥실 내 앞에 얼쩡거린다. 지구가 독한 것들로 미어지다 못해 폭발할 때 별모양으로 터진다면 난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낄까.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닌가.

마침맞다

: 어떤 경우나 기회에 꼭 알맞다.

 

  • 단어를 찾은 곳

하지만 여기 이모네 외식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예약석으로 자리를 안내하는 웨이터의 몸에서는 달착지근한 향수 냄새가 풍겼고, 어딘가에서 직접 연주하는 듯한 잔잔한 피아노음은 우아한 선 남선녀들이 앉은 테이블 사이를 나지막하게 흐르고 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식탁보랄지 꽃처럼 접혀진 냅킨 같은, 세련된 테이블 세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약속시간에 정확히 도착한 이모부가 익숙하게 주문하고 마침맞게 하나씩 나오던 그림 같은 요리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을 참이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주눅 들어 하던 나이는 이미 지났다. 내 주머니 속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약소한 월급으로도 얼마든지 이 식탁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니까..

양귀자, 모순, 15쪽

  • 나의 단어라면
어릴 적 티비에선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티비가 지직거리는 것인지 영화가 지직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영화에선 사람과 컴퓨터가 매끄럽게 곧잘 대화하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기술력과 맞침맞다고 할순 없는 상상력. 그땐 아이도 티비도 꿈을 꾸었다. LUV 컴퓨터가 사람의 말을 듣고 잘못 받아적었다. 곧이어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만 그런 것은 계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장면을 본 아이는 진정한 사랑을 찾기 전까지는 LOVE 대신 LUV를 사용하겠다 마음먹는다. 귀여운 오타인 것처럼, 모양이 예쁘다는 이유로 그는 이후 적지 않은 그의 애인들에게 LUV를 사용해왔지만 다들 귀여워 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 다 커버린 아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신혼집 티비에선 오래된 그 영화를 다시 틀어주고 있었다. 아이는 반가운 마음에 채널을 멈췄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본인이 여태 다른 사람들에게는 LUV를 써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영화는 흘러가고 영화속 주인공이 컴퓨터에게 사랑을 설명했다. "사랑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마음이야.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살아남았지. 사랑은 너를 행복하게, 슬프게, 불안하게, 편안하게, 뜨겁게, 차갑게, 강하게, 또 약하게 만들어주지. " "몰즈, 그것은 계산이 되지 않아." 그 사람을 품에 안은 채 영화를 보며 아이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번째, 지직대는 것은 영화쪽이었다는 것, 둘째, LUV로 일부로 틀려왔던 그 시절이 아이가 사랑을 찾기 위해 가장 사랑했던 시절이라는 것.

추신

가슴이 미어지다 라는 말이나, 사람이 미어 터진다 라는 말은 많이 쓰지만 미어지다라는 말을 기본의 의미로 쓰는 일이 많이 없구나 생각해서 단어를 보며 익숙하면서 낯선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 저는 단어로 예문을 쓰려 생각해보면 단어가 어떤 느낌인지 상상해보곤 하는데요, 왜인지 미어지다는 꽉찬 순대나, 바람이 잔뜩 들어간 돼지 오줌보같은게 생각이 났습니다. 미어지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추신 2

오랜만에 두개의 추신을 씁니다. 두번째 예문 속 영화는 Electric Dreams(1894)입니다. 사실 영화를 다 본것은 아니고 편집된 영상을 우연히 보았어요. 짧은대로 제가 그것을 마주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찾아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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