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솜사탕과 시시콜콜

#12. 별안간(瞥眼間), 소로(小路)

2025.03.24 | 조회 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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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별안간(瞥眼間)

: 갑작스럽고 아주 짧은 동안.

: De pronto 

 

  • 단어를 찾은 곳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여자가 그 아기의 울고 있는 얼굴을 본다. 당황하며 강보째로 아기를 받아 안는다. 그 울음을 멎게 하는 법을 아직 모르는 사람. 믿을 수. 없는 고통을 방금까지 겪은 사람. 아기가 별안간 울음을 멈춘다. 어떤 냄새 때문일 것이다. 또는 둘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 보지 못하는 아기의 검은 눈이 여자의 얼굴 쪽을 -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 향한다.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채, 아직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 피냄새가 떠도는 침묵 속에서. 하얀 강보를 몸과 몸 사이에 두고.

De pronto el bebé deja de llorar.

한강, 흰, 17쪽

  • 나의 단어라면
말은 언제나 생각보다 날카롭고 글은 언제나 말보다 선명하다. 글로 생각을 써내려가는 일은 직선만으로 구를 그려내는 일 같다. 날카로운 칼질로 하늘을 깎아 구름을 만드는 일. 두리몽실하고 뿌연, 어쩌면 향기같이 흩어져있는 마음을 한글자 적어내다 보면 공원 앞 아저씨가 파는 솜사탕을 구태여 꾹꾹 쥐어 내어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 같다. 흐리멍텅했던 분홍색 설탕구름이 짙은 붉은색 설탕막대처럼 눌려있을 때의 작은 좌절감. 혹은 실망감. 솜사탕을 다시 풀어헤쳐 원래처럼 만들지 못하듯이, 글을 적고나면 별안간 원래의 생각은 이미 두둥실 사라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은 건 붉은색 사탕실 뭉치.

소로(小路)

: 작고 매우 좁다란 길. ≒세경, 협로.

: un estrecho sendero (a narrow path)

  • 단어를 찾은 곳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돌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Mientras caminaba por un estrecho sendero donde las alondras cantaban con trinos agudos y los árboles espesos extendían sus ramas como brazos infinitos,

한강, 흰, 28쪽

  • 나의 단어라면
큰 횡단보도 몇개를 건너 소로로 접어들면 드디어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길부터 내 집인 것 같은 감각. 나의 집 기다란 복도에는 가로등도 서있고, 빨간 해도 갇히고, 바닥엔 민들레도 꿈틀댄다. 대부분 시시콜콜한 일들이지만 가장 위대한 일이다. 어둠을 밝히고, 데우고, 와중에 태어나고, 나는 집에 돌아가고. 사람 두명이 겨우 들어나 갈까 한 그 골목은 늘 가득히 복작거린다.

추신

같은 글을 여러번 읽으며 단어를 찾다보니, 단어의 난이도가 평이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별안간이라는 단어를 내가 글을 쓰며 사용한 적이 있나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서 그냥 하기로 합니다. 동시에 이제 어느 곳에서 단어를 찾아야 할지 정말로 고민할 때가 오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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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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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es_eo의 프로필 이미지

    spes_eo

    0
    18 day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 은비의 프로필 이미지

    은비

    0
    18 days 전

    하도 여러번 읽어서 책 제목이 누런으로 바뀌겄다 곧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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