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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 생일

#09. 모로, 지척(咫尺)

2025.03.02 | 조회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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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모로

: 비껴서. 또는 대각선으로.

: 옆쪽으로.

: de costado

 

  • 단어를 찾은 곳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Mi madre se tendió de costado abrazándola y resistió llorando hasta que se le secaron las lágrimas, mientras su cuerpecillo se iba enfriando poco a poco.

한강, 흰, 19쪽

  • 나의 단어라면
'그것'은 본인이 그러했듯 아무것도 없던 곳에 잘도 새로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 아무 이유도, 맘편히 이유라고 우길만한 작은 갈피도 없던 곳에 멋대로 다리를 놓는다. 난잡한 세상은 의외로 종이 몇장으로 요약되지만, '그것'은 가장 단순한 모양새로 가장 난잡하게 요약된다. 검은색 종이에서 순백의 솜뭉치가 튀어 나오듯이. 새까만 중에 새하얀 일이지만 나는 이것이 까맣게 물드는 일이 의심되지 않는다. 역행할 수 없는 것들이 역행한다. 아기에게 말을 가르칠 수 있지만 어른에게 말을 지워낼 순 없다. 그러나 나는 배웠던 적이 있기는 했냐는 것처럼 벙어리가 되고, 바보가 되고. 침대에 모로 누워 종아리가 전부 밖으로 튀어나온 채로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생각하고. 종이가 물에 젖으면 영영 쓰지 못하듯이, '그것'은 사람을 망치고, 물에 젖은 종이는 갑자기 멀쩡해지고, '그것'은 사람을 구한다. 나에게는 사랑, 당신에게 '그것'은?

지척(咫尺)

: 아주 가까운 거리.

: cerca

 

  • 단어를 찾은 곳

새벽만큼 짙지 않지만 아직 반투명한 트레이싱지 같은 안개가 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갑자기 안개를 걷어내면, 복원된 새 건물들 대신 칠십 년 전의 폐허가 소스라치며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녀의 지척에 모여 있던 유령들이, 자신들이 살해되었던 벽을 향해 우뚝우뚝 몸을 세우고 눈을 이글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스라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촛농은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 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넣으며 초들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Quizá los fantasmas que se apiñan cerca de ella se levantaran altos en la pared contra la que fueron asesinados y sus ojos refulgieran de furia.

 

한강, 흰, 39쪽

  • 나의 단어라면
25년 전 오늘 친구는 태어났다. 달력을 전부 뜯어 한곳에 펼쳐보겠다. 그리고 다시 작년의 달력도 전부 뜯어 같은 날 위에 겹친다. 그리고 다시 그 전의 해를, 그 전의 해를, 그렇게 25번 겹치고 난 뒤 기다란 바늘 하나를 들고 푹 한곳에 찌른다. 3월 2일에. 바늘은 종이들을 관통해 오늘에 닿는다. 찌르듯이 통과한 나날들을 생각한다. 세기 시작하면 끝도 없지만 어느새 지나있는 모든 나날들. 그동안의 시간이 만들어온 내가, 다시 그동안의 시간을 편집해 저장한다. 시간이 지나며 너의 지척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너의 친구인 나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에서 친구는 동갑이어야 하니까 나도 저 종이 더미들 사이에 같은 길이의 큰 바늘을 하나 박아 놓고 살고 있는 셈이다. 실같이 얇은 종이라도 쌓이면 두께가 생기듯 눈감으면 사라지는 찰나가 겹쳐 바늘에 가장 첨단에 찔려 있던 삶의 첫 날은 기억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다쓴 영수증을 겹쳐 꽂아놓듯 청구된 삶의 조각들이 아름답게 모여지기를 바란다.

추신

책을 열심히 읽으며 저라면 쓰지 못했을 단어들을 찾아냅니다. 단어가 이렇게 끝도없이 나오는데, 문장은, 문단은 또 책 한권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아득하면서도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습니다. 이 책이 끝나고 나면, 다음은 시집이 될지 혹은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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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서리

    0
    about 1 month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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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비

    0
    about 1 month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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