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노래와 종이

#10. 천변(川邊), 가령

2025.03.10 | 조회 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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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川邊)

: 냇물의 주변.

: la orilla

 

  • 단어를 찾은 곳

여름날 서울의 천변을 걷다가 그녀는 두루미를 봤다. 온몸이 희었는데 발만은 밝은 빨강이었다. 새는 반들반들하고 넓적한 바위 위로 올라가 그 두 발을 말리는 중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았을까? 아마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란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무심히 건너편 기슭을 바라보며 빨간 발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을 것이다.

Vio una grulla un día de verano en que caminaba por la orilla de un arroyo de Seúl.

한강, 흰, 74쪽

  • 나의 단어라면

비행기에 앉으면 핸드폰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는다. 차라리 하늘을 날면 저장해놓은 영화라도 보겠는데, 뜨지도 않은 비행기에서 먼저 틀기엔 아까운 느낌이 든다. 아쉬운대로 노래를 틀었지만 들리지 않는다. 화면에선 해보는대로 해보는데 잘 안된다는 듯이 로딩창만 돌아간다. 됐다 싶어서 책을 집어든다.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크기가 작아 여행때 늘 들고 다닌다. 시 혹은 산문집이라 순서없이 읽어도 되어서 좋다. 예와같이 아무데나 펼쳐 읽었고, 알쏭달쏭한 문장들 사이에 숨어있는 글쓴이의 마음을 읽으려고 한참을 펴놓고 있었다. 별안간, 미처 빼지 않은 이어폰에서 노래가 터져 나왔다. 반주없이 맨 처음부터 가수의 목소리가 나오는 노래였다. 첫 가사는 ‘난’. 그래 ‘넌’ 지금 와줬구나. 순간 주변이 다채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색이 있는 것들인데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음도 향수나 잉크처럼 삽시간에 퍼진다는 것을 알았다.
비행기가 떴다. 강을 옆에 둔 활주로를 떠나, 비행기는 천변(川邊)에서 천변(天邊)으로 간다.노래야 끊기지 말아줘. 끊기지 말아줘.. 끊기지 말아….뚝.


가령

: 가정하여 말하여.

: 예를 들어.

: 문장에 없음

 

  • 단어를 찾은 곳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며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Tenías una risa blanca. Usado de este modo, indica que eres una persona que sufre en silencio y se esfuerza por sonreír.

한강, 흰, 78쪽

  • 나의 단어라면

비가 오는 날이면 저는 종이가 물에 젖을까 가방을 껴안고 뛰어 갑니다. 한번 젖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죠. 저는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종이가 물에 젖을 때마다 왜 그렇게 속이 상하고 아쉬운지요. 마치 다시는 못볼 사람을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가령 한번 젖은 종이를 잘 말려보면 원래처럼 돌아올까 생각도 하지만, 언제나 어림없이 쭈굴거리는 종이를 볼 때마다 애초에 물과 만나지도 않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젖은 종이는 불에 타거나, 갈아버린 것과 다르게 애처로운 형태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세게 만지면 지워지듯 보풀을 일으키며, 나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는 듯 해 속상합니다. 잉크로 새겨놨던 제 글은 이미 없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말리면 그만일 몸을 들이대 희고 얇은 종잇장을 숨깁니다.


추신

여러분은 글을 읽을 때 어떤 목소리로 읽으시나요? 저는 보통 제 목소리이지만 조금 더 차분하고 정돈된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실제로 소리내어 읽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더라구요. 한강 작가님의 흰은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으로 여러 인터뷰를 접하고 난 뒤라 처음에는 작가님의 목소리로 읽혔던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제 목소리로 읽고 있어요.
아 비행기에서 들은 노래는 한로로의 ‘정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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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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