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어

호칭과 먼지 묻은 이야기

#34. 연적(戀敵), 포말(泡沫)

2025.09.01 | 조회 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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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연적(戀敵)

:  연애의 경쟁자. 또는 연애를 방해하는 사람.

 

  • 단어를 찾은 곳

"진모 일은 너무 안됐어. 하지만 진모가 한 일은 정말 옳지 못한 거야.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잖아. 나는 정말 모르겠더라. 진모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어." 진모의 행동을 꾸짖는 천사의 얼굴은 엄격했다. 그건 옳은 말이었다. 졸개들과 더불어 연적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갈겨대는 짓 따위는 해서는 안 될 일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나라면 주리처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양귀자, 모순, 173쪽

  • 나의 단어라면
넌 나를 뭐라고 부를 거야. 만나기로 한 지 처음 되는 날 그녀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멀쩡히 이름이나 호칭을 부른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그저 '저기, 근데, 내가' 등으로 시작했던 문장이 마치 그동안 모호 했던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에 그녀와 닮아 있는 단어들을 찾고, 오글거리거나 부끄러울 만한 것들은 뺐습니다. 괜히 이름은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약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내가 그녀를 불렀을 때 뒤돌아 본다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연적이라도 된다면 정말 기절할 노릇일 겁니다. 나는 두세개 정도 단어를 던졌고. 그녀는 그 중에 하나를 골랐습니다.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녀가 내 곁에 있음을 확인하듯 그 단어를 계속 불렀습니다. 계속해서 같은 단어를 부를 수록 그 단어가 단단히 차오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삶에서 그 단어는 다른 의미로 사용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혹은 그 단어를 평생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포말(泡沫)

: 물이 다른 물이나 물체에 부딪쳐서 생기는 거품. =물거품.

: 포스트 말론 (미 가수)

 

  • 단어를 찾은 곳

"안진진! 괜찮아?"

서울에서 고창까지, 점심 먹은 시간까지 포함해서 대여섯 시간 달리는 중에도 그는 한 시간에 한 번씩 긴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괜찮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당장 차를 돌릴 수 있다고 묻는 것 같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는 나도 모를 비장한 각오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운명의 길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디 그것뿐이었을까. 하염없이 반짝거리는 녹색 물결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의 절경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숨막히는 비장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너무도 아름다워서 울고 싶은 풍경 속을 뚫고 달렸다. 저 바닷속으로 이 지프가 굴러 들어가도 무방해·• 이 고단한 생애를 등지고 물결의 포말이 되어도 상관없어…정말 괜찮아......

양귀자, 모순, 191쪽

  • 나의 단어라면
두 남자가 파란색 플라스틱 간의 책상을 쭉 펴 놓은 노포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행하는 동네는 아닌 터라 주변엔 온통 할아버지들 뿐이었고, 때문에 그들은 오래된 책을 넘기다 유난히 하얀 두 페이지 같은 존재감을 뽐냈다. 북적거리는 노점 거리에선 온갖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야기들은 모두 소주 냄새가 났고, 허구인지 진실인지 모르는 것들이 계속해서 붙어나갔다. 둘은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정치 이야기, 군대 이야기, 자랑스러운 과거 이야기, 먼지를 후후 불어내고 소중히 가져오는 이야기들은 쉴새 없이 밀려 들어왔고, 가끔은 그들을 인식하는 듯하는 눈빛도 느낄수 있었다. 파도같은 밀려드는 이야기에, 그 포말에 엉켜 둘은 밤새 그곳을 나오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었다.

추신

첫번째 단어를 찾은 문단은, 모순의 내용을 크게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옳은 말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삶의 수많은 모순을 마주하고 있는 안진진의 시야를 크게 관통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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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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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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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서리

    0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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