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슴아슴
- 단어를 찾은 곳
아버지는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호흡이 아니라면 살아있다 말할 만한 어떤 활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무참하게 무너진 이 노인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던 아버지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슬픈 일몰의 시간에 어둠을 등에 지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쓸쓸한 귀가는, 그 풍경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이 있었다. 저녁 바람에 날리던 검은 머리칼, 깊숙한 곳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검은 눈동자, 구겨진 바지 주름 사이에 숨어있다 아버지가 움직일 때마다 아슴아슴 풍겨져 나오던 저 먼 곳의 냄새••••·
양귀자, 모순, 261쪽
- 나의 단어라면
혼곤(昏困)하다
- 단어를 찾은 곳
복잡한 인생 때문에 내 마음자리는 어수선했지만, 아버지는 고단한 인생을 혼곤한 잠 속에 부려놓고 오래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깥세상은 떠들썩했으나 우리 집의 성탄 전야는 한없이 고요 하게 깊어갔다. 그리고 또한 거룩했다.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버지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아버지가 눈을 뜨는 순간에 내가 거기 있고 싶었다. 혼곤한 잠 속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가장 먼저 나를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양귀자, 모순, 268쪽
- 나의 단어라면
추신
오늘은 추석입니다~~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바라요. 역설적으로, 초라하게 돌아온 아버지 관한 부분을 다룹니다. 제가 소설에서 가장 슬퍼하는 장면이기도 한데요, 태산같던 바람같은 시간에 깎여 나가는 일은 너무 마음 아픈 것 같아요. 저항도 못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서요. 무튼 먹는 것보단 덜 살찌는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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