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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과 니

#39. 아슴아슴, 혼곤(昏困)하다

2025.10.06 | 조회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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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슴아슴

: 정신이 흐릿하고 몽롱한 모양.

 

  • 단어를 찾은 곳

아버지는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호흡이 아니라면 살아있다 말할 만한 어떤 활기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무참하게 무너진 이 노인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던 아버지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슬픈 일몰의 시간에 어둠을 등에 지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쓸쓸한 귀가는, 그 풍경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이 있었다. 저녁 바람에 날리던 검은 머리칼, 깊숙한 곳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검은 눈동자, 구겨진 바지 주름 사이에 숨어있다 아버지가 움직일 때마다 아슴아슴 풍겨져 나오던 저 먼 곳의 냄새••••·

양귀자, 모순, 261쪽

  • 나의 단어라면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는 만남일까 이별일까 사랑은 거품같아서 금방 끓다 내려오지 대신 채워지는 건 차디찬 글라스에 노오란 맥주같은 그리움 그리움을 꼴깍대다 동이나면 그때는 돌아갈시간 혹은 돌아올 시간 맥주잔은 모래시계 후두둑 내리는 비에 고향길은 아슴아슴 만남과 이별의 개수는 같대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옛날 집-

혼곤(昏困)하다

: 정신이 흐릿하고 고달프다.

 

  • 단어를 찾은 곳

복잡한 인생 때문에 내 마음자리는 어수선했지만, 아버지는 고단한 인생을 혼곤한 잠 속에 부려놓고 오래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깥세상은 떠들썩했으나 우리 집의 성탄 전야는 한없이 고요 하게 깊어갔다. 그리고 또한 거룩했다.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버지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아버지가 눈을 뜨는 순간에 내가 거기 있고 싶었다. 혼곤한 잠 속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가장 먼저 나를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양귀자, 모순, 268쪽

  • 나의 단어라면
나는 끝까지 너의 호칭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그 빠른 기차도 우린 두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에 내가 너를 그렇게 빨리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너를 이해하려 할 수록 너는 뿌얘져갔다. 혼곤은 이럴때 쓰는 말이란걸 알았다. 나는 너를 점점 몰랐다. 우리 멀리 떠나자. 내가 생각 할 수 있는것은 이것 뿐이었다. 고향에서 우리의 거리가 절대적으로 먼 곳. 내가 무엇을 하던 너가 무엇을 하던 어색한 곳. 그곳으로 가자. 나는 거기에서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너도 그곳에서 온전히 나를 사랑하고. 우리 빨리 흐릿해지자. 거리를 극복하자. 우리는 여전히 '너'대신 '니'라고 부르며.

추신

오늘은 추석입니다~~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바라요. 역설적으로, 초라하게 돌아온 아버지 관한 부분을 다룹니다.  제가 소설에서 가장 슬퍼하는 장면이기도 한데요, 태산같던 바람같은 시간에 깎여 나가는 일은 너무 마음 아픈 것 같아요. 저항도 못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서요. 무튼 먹는 것보단 덜 살찌는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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