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로,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만났을 때보다 외갓집에서 다른 식구들과 어울려 만날 때 훨씬 정다웠다. 그럴 적의 두 사람은 어린애처럼 별것 아닌 일에도 손을 마주 잡고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만우절날 쌍둥이 딸을 낳고 만우절날 쌍둥이 딸을 한꺼번에 결혼시킨 바 있는 외할아버지는 딸들의 친정 나들이를 몹시 좋아하여서 내가 그러는 것처럼 한시도 딸들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니, 나보다 더했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는 조각가 같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혹여 흠집이라도 생겨있으면 난리가 났다.
또 한 사람, 쌍둥이 딸들 밑으로 간신히 얻은 외삼촌도 똑같았다. 아직 총각이었던 그때의 외삼촌은 누이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쌍둥이 누이들이 한꺼번에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던 날, 사흘간이나 밥을 먹지 않고 시름에 잠겨있었다는 외삼촌이었다.
양귀자, 모순, 128쪽
나의 단어라면
종로 구석에서 매운탕을 먹던 이영은 하영에게 말했다. 준수는 젓가락으로 탕 속의 쑥갓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야 이거봐바, 축 쳐진 쑥갓 말야. 너 쑥갓 꽃 본적 있어? 우리 아파트 뒤에 큰 배밭이 있거든, 거기서 땅을 조금 내어 주말 농장으로 세를 주기 시작한거야. 우리집도 거기서 땅을 조금 빌려 오이같은 애들을 심기 시작했어. 어느날 잡초를 뽑는데 옆집 밭에 눈길이 갔어. 작고 희끗한, 아기자기한 꽃이 가득한거야. 나는 처음에 꽃을 심은 줄 알았어. 겉은 흰색에 안쪽은 샌노란 계란 후라이같은 꽃이었지. 저건 무슨 꽃일까 보는데 잎사귀 모양이 눈에 익더라고. 쑥갓이었어. 매운탕에서나 보던 애가 그렇게 귀여운 꽃이라니, 이질적이더라. 인터넷에 쑥갓 꽃을 검색해봤어. 그랬더니 세상에, 쑥갓이 영어로 크라운 데이지더라. 그 이쁜 데이지 말이야. 유럽에선 관상용으로 화단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거야."
이영은 쑥갓을 건져올려 입으로 집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로 난 내가 이 쑥갓같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어. 하영아, 나는 이 나라를 나갈 거야. 유럽으로 갈래. 나는 여기 있으면 매운탕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해.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여기에선 그저 시름많은 젓가락질의 대상이고, 씹을 거리일 뿐이야. 나는 아름다운 화단에서 아름다운 꽃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 젓가락질 말고, 아름다운 손짓을 받을래. 미안해. 매운탕집에서 할 말은 아닌데."
하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이미 말랑거릴듯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쪽은 이영이었다. 하영은 그 눈물이 이른아침 꽃잎에 맺히는 이슬같다고 생각했다.
"아이구, 그래요. 난 생각이 모자라는 에미고 당신은 생각이 넘치는 아버지구랴. 다 큰 딸년들은 방에다 모셔놓고 꼼짝도 못하게 하면서, 나 혼자 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어떻게 해내라고 그러슈. 여기 갈비도 있겠다, 장조림도 있겠다, 닭다리 튀겨놓으면 처지기나 하지."
시집 와서 이십 년이 넘도록 외할아버지한테 말대꾸는커녕 얼굴색 한 번 바꿀 줄 몰랐다던 외할머니도 그 즈음에는 콩당콩당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였다. 그리고 콩당콩당 하는 말씀일지언정 외할머니의 말이 다 맞았다. 친정에 다니러온 딸들 손에 물 묻히고 싶지 않은 심정은 외할머니도 매일반이고, 외할아버지가 사들 인 음식재료는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많았으므로.
양귀자, 모순, 129쪽
나의 단어라면
런던 한복판의 화단에서 아담은 릴리에게 말했다. 둘은 벤치에 앉아 꽃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릴리, 저기 데이지 보여? 보통 데이지가 하얀 꽃잎에 노란 중심인데, 개중에 꽃잎부터 조금 노란기가 퍼져 있는 놈들이 있거든. 크라운 데이지라고 한대. 조금 다른 것 같아서 검색해본적이 있거든. 근데 더 신기한건 뭔지 알아? 한국에선 이걸 먹는대. 잎을 허브로 쓴대. 수프에 넣어 먹는대. 근데 생각이나 해본적 있어? 화단에나 있는 놈이 어디에선 시장에 한가득 쌓여있는 모습을?"
릴리는 관심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담은 어딘가 답답한듯 말했다.
" 릴리,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저기 화단에 있는 꽃같이 멀뚱멀뚱 해나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저기 저 울타리로 가둬놓은 멍청한 화단 안에선 장미나 데이지나 쓸모없는 건 매일반이라고.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겠어. 나를 갈아넣을 곳으로 갈거야. 릴리, 나는 변화가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가지 않을래? 음악, 음악을 하자. 어려우면 버스킹을 하고, 운이 좋으면 공연을 할 공간을 가질 수도 있을 거야. 무엇이든 여기 꼼짝없이 박혀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릴리는 그제서야 대답처럼 놀란 눈을 치켜 들었다. 늘 하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 갑자기 떠나자니...그치만 음악과 아담, 그녀가 사랑하는 두가지가 모두 떠나자고 하는 것을 도무지 거절할 순 없었다. 화단 앞 벤치가 마치 비행기 좌석같았다. 릴리는 살짝 신이 나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국에 가더라도 데이지가 들어간 그 수프를 먹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추신
첫번째 글의 배밭 부분은 제 진짜 이야기입니다. 쑥갓 꽃이 너무 예뻐 한번, 이름이 데이지라는 데에서 또 한번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허구이지만, 공간에 따라 그 이름과 쓰임새가 다르다는 점이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번주는 제가 스페인에서의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주인데요, 쑥갓이 된 데이지를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더 긴 여정이 될 것같은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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