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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A와 미련한 여행

#25. 노획물(鹵獲物), 부랑(浮浪)

2025.06.24 | 조회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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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노획물(鹵獲物)

: 싸워서 빼앗은 적의 물품.≒노획품.

 

  • 단어를 찾은 곳

아버지는 노획물을 혼자 차지하고 시치미 떼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반드시 어린 딸에게 일정 부분을 나누어주는 신사도가 있었다. 내 손에 돈을 쥐어주며 아버지가 했던 말들은 또 얼마나 신비로웠던가.

"안진진. 우린 지금 비밀을 나눈 거야. 너 반쪽, 나 반쪽.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네 것과 내 것을 서로 맞춰봐야 하니까 잘 간직해야 돼. 두 개가 딱 맞아야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어. 안 맞으면 우리는 영원히 아빠와 딸 사이인지 모르고 슬프게 사 는 거야.”

"그럼, 이 돈을 반쪽으로 찢어야 하는 거예요?” 나는 종이돈을 흔들며 그렇게 물었다.

“아니야, 돈은 찢는 게 아니라 쓰는 거야. 그건 네 마음대로 쓰 면 돼.”

“그럼, 뭘로 맞춰봐요?”

“여기 있잖아? 언제나 잊어버리지 않고 지니고 다니는 것. 바로 이 손!”

아버지는 자기 손과 내 손을 활짝 펴게 해서 서로의 손바닥을 맞닿게 했다. 여덟 살 어린 계집애의 작은 손과 서른여덟 살 아버지의 큰 손은 잘 맞춰지지 않았다.  

양귀자, 모순, 89쪽

  • 나의 단어라면
A는 한국에서 꽤 잘나가는 밴드의 보컬이다. 고교시절 A는 동네 친구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고, 어설프게 만든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아 5년이 지난 지금 전국적으로도 잘나가는 밴드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년간의 시간들을 통해 오늘 드디어 굴지의 락 페스티벌의 아티스트로 공연하게 되었다. A는 무대 밑에서 열광하던 중학생의 A를 떠올리며 무대 위로 올랐다. A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와 있었다. 연인, 친구 혹은 자기 자신과. A는 노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마지막 드럼소리를 구령삼아 크게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내려왔다. 멤버들과 밥을 먹고, 다음 날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 소리도 없었다. 온갖 소리가 울리던 곳에서 돌아온 집은 너무나 어두웠다. 깜깜히 조용했고 조용히 어두웠다. A는 마치 자신이 화려한 전쟁에서 훌륭하게 공을 거두었지만 아무 노획물도 건지지 못한 영웅같다고 생각했다. 또 A는 자신이 수많은 구두를 닦았지만 자신의 구두를 닦아본 적은 없는 구두공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는 A는 자신이 조만간 사라지고, 방이 큰 스피커가 되어 노래만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랑(浮浪)

: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 단어를 찾은 곳

아버지가 건달의 삶을 지나 서서히 부랑의 길로 빠져들었던 것은 어머니의 양말 장사가 이제는 어엿한 생계 수단으로 자리 잡던 시기와 일치했다. 어머니의 좌판은 날로 넓어졌고, 어머니가 파는 양말은 나날이 가짓수가 늘어갔다. 아버지는 몇 장의 지폐를 훔쳐 집을 나갔다가 돈이 떨어지면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훔칠 수 있는 지폐가 제법 양이 많아지면서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날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어쩌다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 혼자 쉴 새 없이 정색을 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누구나 다 똑같이 살 필요는 없어, 그렇지? 여보, 내 말이 맞지?”

나를 보고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양귀자, 모순, 91쪽

  • 나의 단어라면
갈 곳을 몰라 헤매는 사람을 부랑자라고 할 수 있을까. 부랑자는 일정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그 사람은 길을 찾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좋고 싫음이 있고, 마음이 있고, 막막함이 있는 사람은 부랑의 자격이 없다. 설령 그가 끝도 없이 미련하고, 어느새 다른것들에 정신팔려 있는, 길 못찾는 초파리의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헤매이고 있는 상태 보다는 헤매는 이의 눈빛이다. 필요한 것을,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 반짝이는 눈빛은, 그 어느 부랑같은 순간도 여행으로 만들지 않는가. 그리고 세상에 똑똑한 여행은 있어도 미련한 여행은 없다.

 추신

할 일은 많고 생각도 많고 시간은 없어서 지각했습니다.. 메번 낯선단어들을 익숙한 문장들 사이에 넣어가는 일을 하다보니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다고 느낍니다. '나의 단어' 자체도 제게 낯선 단어,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한 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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