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내가 두 사람 앞에서 판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되었다. 나는 김장우를 사랑하고 있다. 나영규에게는 사랑과 유사한 감정의 의사 사랑이 있었을 뿐이었다.
양귀자, 모순, 219쪽
나의 단어라면
악에 받힌 그의 노래는 아주 엉망이었다. 그는 가깝다면 괴성에 더 가까울 노래를 질러대며 몸을 부르 떨었다. 아무도 없는 항구에서, 아니, 너무 어두워 누가 있더라도 알 수도 없이 새까만 항구에서 그는 비틀대는 몸짓으로 조금씩 조금씩 바다를 향해 갔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울부짖게 만들었을까. 그를 배신한 사람들 때문인가. 계속해서 어긋나는 시간들 때문인가. 아니, 그는 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주저 앉힌 것도 본인이라는 생각에, 마치 본인에게 찐득하게 붙은 무언가를 떼 내려는듯한 몸짓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는 스스로를 그가 사랑하는 자신과 싫어하는 자신으로 분리하려 했다. 하지만 한참을, 정말 한참을 노래하다 지친 그는 결국 모든 것이 믿을수 없게 촘촘히 엉킨 실덩어리같은 스스로를 발견했다. 나라는 존재에선 그 어떤 것도 판이하게 떨어뜨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구름에서 하늘을 뗄 수 없듯이. 그는 스스로에게서 아무것도 떼 낼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그렇게 항구에 방기했다. 노래는 달콤하지 않았으므로 오는 배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지? 그렇지? 오늘이 지나려면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았잖아."
"참, 이모는. 그래서 내가 필요했어요? 집에서도 첫눈을 기다릴 수 있는데, 이모부랑 함께 기다리는 것이 더 근사한데, 고작 안진진한테 같이 기다려보자고 전화한 거예요?"
"싫으니? 너, 다른 약속 있었어?"
순간 이모의 얼굴에 희미한 섭섭함의 흔적이 어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말투는 내가 늘 이모에게 쓰는 것이었다. 이모가 나를 불러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나는 평소의 화법대로 말했던 것 뿐이었다. 이모가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양귀자, 모순, 224쪽
나의 단어라면
나는 그 사람에게 쥐고 있던 칼을 넘겨 줬다. 내 칼을 그 사람의 손에 쥐어주며, 나를 언제든지 찌를 수 있도록 했다. 그땐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눈을 감고 절벽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사람처럼, 내 운명을 다른 것에 맡기는 것. 나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그사람에게 주었다. 그의 의지를 따라 가겠다는 나의 의지.
침대 옆 창문은 아침마다 너무 많은 빛을 뿜어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그러니 밤마다 나와 그 사람의 그림자가 흰 블라인드에 어렸다. 그럼 우리는 네명처럼 같이 춤췄다. 늘 두명은 똑같은 동작을 했다. 그러다 네명은 꼭 한명이 되었다. 밤은 늘 예상보다 따뜻했다.
사랑은 때론 너무 선명해 보이다가도, 그 블라인드의 그림자처럼 한없이 모호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사람은 그 사람의 손에 내 칼이 있는지도 모른채 팔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모르게 나는 베였다. 눈물 어린 얼굴이 알람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그녀의 팔이 잠투정처럼 나를 아프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헤어진 곳은 밤거리였다. 가장 로맨틱하게 잔인한 공간. 나는 그곳에서, 밤의 물기와 가로등 빛이 만나 어리기 시작한 그 거리에서 칼에 찔렸다. 이번엔 잠꼬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명확히 나의 마음을 찔렀고, 그럴 의도였을 것이다. 꽂힌 칼을 바라보았다. 칼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추신
어리다 라는 단어에 뜻이 많더라구요. 뭔가 맺힌듯 아른거리게 있는 어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연애의 짧은 과정을 설명하며 네가지 뜻으로 단어를 다 써보고 싶었습니다. 아, 두번째는 빠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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