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수야님,
2025년의 첫 편지를 써요. 밤사이 눈이 내려서 브루클린의 거리는 하얀 눈으로 덮여있어요.
제 연말은 예상치 못한 고요한 시간들로 채워졌어요. 작년 하반기,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지만 그 과정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답니다. 불편한 도전들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점점 커지는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마주해야 했거든요. 일러스트 챌린지에 참여했을 때, 아트 디렉터에게 작업물을 제출하기 위해 끊임 없이 수정작업을 하면서도 '이게 맞나?' 하는 의문과 불안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렇게 쌓인 감정들이 연말이 되어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번아웃이 찾아왔죠.
그래서 1월은 그 감정들을 돌보고, 다시 달릴 수 있는 연료를 채우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어요. 혹시 <The Artist’s Way>라는 책을 아시나요? 퇴사 전에 샀다가 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인데,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제게 꼭 필요한 책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마침 뉴욕의 아트카페 Happy Medium에서 이 책으로 북클럽을 연다기에, 망설임 없이 참여하게 됐어요.
저자는 12주간 일상에서 우리 내면에 숨어있는 창조성을 발견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안내해줘요. 매주 다양한 활동들이 제시되는데, 그것 외에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창조성 회복의 기본 도구가 있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자 마자 쓰는 모닝페이지와 매주 1시간, 내면의 아티스트와 만나는 혼자만의 시간, 아티스트 데이트죠.
벌써 4주차에 접어들었네요. 저는 아티스트 데이트를 통해 ‘어린 시절을 나’를 만나고 있어요. 열 번도 넘게 읽은 <셜록 홈즈>를 다시 읽으며 홈즈의 추리 과정에 흠뻑 빠져들었던 중학생의 나를, 여행지에서 간단한 그림을 그리며 만드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를, 문구점에서 예쁜 노트와 펜을 고르며 설렘을 느끼던 고등학생의 나를요.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들은 결국 어린 시절의 순수한 열정과 맞닿아있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어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요.
Just as a recovering alcoholic must avoid the first drink, the recovering artist must avoid taking the first think. Recognise self-doubt as a creative virus.
(알코올 중독자가 첫 잔을 거절해야하는 것처럼, 내면의 아티스트도 자신을 향한 첫 번째 부정적인 생각을 무시해야 한다).The Artist's Way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번아웃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저는 내면의 부정적인 목소리를 모두 받아들인채 억지로 앞으로만 나아가려 했던 거죠. 정작 필요했던 건 오랜시간 상처받은 내면의 아티스트를 회복하고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것이었는데 말이에요.
얼마 전에는 밑미에서 만난 메이트분과 온라인으로 타로를 봤어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궁금한 점들을 질문하고, 카드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참 흥미로웠어요. 제 출생카드는 여사제인데요. 직관이 강하기 때문에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래요.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 날들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어요.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정말 궁금했던 미대 수업 대신 그럴듯해 보이는 정치외교학 수업을 선택했던 때, 유럽 대학으로 편입을 꿈꾸다 결국 현실과 타협하고 미국에 남기로한 순간, 퇴사를 결심하기 전 주변의 우려 섞인 조언들을 하나둘 모아갔던 날들, 진심으로 도전하고 싶은 커리어 방향을 알면서 타인이 좋다는 길에 자꾸만 흔들리던 시간.
제 내면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데 타인의 조언이나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흔들렸던 순간들이 참 많았어요.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은 처음 마음이 가리켰던 길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여러 번 하게됐고요. 그래서 올해는 그 내면의 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여보려고 해요.
수야님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7-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수야님께서 일과 삶을 다시 돌아보며 새로운 방향 찾기 위해 노력하신걸 알기에, 이 소식이 더욱 반갑게 느껴져요. 새로운 환경에서의 한 달은 어떠셨나요? 어떤 순간들이 수야님을 설레게 하나요?
이제 곧 한국은 설 연휴네요! 미국에 온 이후로 설날을 따로 챙기지는 않지만, 다음 주엔 백숙을 끓여먹으며 가족들과의 추억을 떠올려보려 해요. 따뜻하고 포근한 설 연휴 보내세요.
P.S
어제부터 목이 따끔거리기 시작했어요. 감기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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