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수야님,
벌써 2월의 끝자락이네요. 지난 편지에서 수야님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어요. 특히 '이유'를 파고드는 것에 대한 고민이 참 와닿았어요. 저도 최근 '성장'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이유를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성장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정말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할까요? 최근 폴 자비스의 <1인 기업>을 읽다가 이 구절에 밑줄 그었어요.
In a world obsessed with growth, choosing to stay small and focused can be a radical act of defiance and authenticity…The pursuit of growth for growth's sake often leads to compromised values and diluted impact.
(성장만을 좇는 세상에서, 작은 규모를 유지하며 본질에 집중하는 것은 하나의 저항이자 진정성을 지키는 일이 될 수 있다... 성장 자체를 위한 성장은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희생시키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진정한 영향력을 흐릿하게 만든다.)폴 자비스 <1인 기업>
한국에서 자라면서 '성장'이라는 단어는 제 삶의 모든 순간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어린 시절엔 키가 자라고 이가 나는 자연스러운 신체적 성장이 있었다면, 청소년기를 보내며 그것은 점수와 등수, 스펙이라는 측정 가능한 가치들로 변모했죠. 당시엔 '성장'이란 단어를 자주 쓰진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하루하루가 그런 가치들을 좇는 치열한 경쟁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한 세대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을 '빠르고 측정 가능한 발전'이라는 틀에 가두게 된 것 같아요. GDP 성장률, 소득 수준 등 수치화할 수 있는 지표들이 성장의 척도가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영역으로도 이어졌죠. 학생의 성장은 성적으로, 직장인의 성장은 연봉과 승진으로 측정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성장=성취'라는 믿음이 우리 삶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 같아요. 삶의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데, 우리는 여전히 '일'이라는 한 영역에 치우친 성장을 좇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살고 있는 뉴욕도 마찬가지예요.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처럼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죠. 대신, 이곳에서는 성장에 대한 압박이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한국이 학벌이나 대기업 입사처럼 정형화된 성공 경로를 중시한다면, 뉴욕은 경로는 자유롭지만 '나만의 길'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빠른지 끊임없이 증명하길 요구해요. 특히 스타트업 문화가 이를 잘 보여주죠. 'Work hard, play hard'라는 말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기도 해야해요. 창의적이면서도 생산적이어야 하고, 자유롭지만 성과를 내야 하죠. 결국 형태만 다를 뿐, 성장에 대한 강박은 여기서도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퇴사 후 갭이어를 보내면서 이렇게 오랜시간 내재화된 성장 속도에 대한 압박감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동안 내렸던 많은 결정들이 '빠른 성과'와 '가시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아요.
사실 갭이어 이전부터 저는 '성장'이라는 단어에 중독되어 있었어요. 김미경 강사님도 최근 자신의 과도한 성장 추구가 가져온 번아웃과 내면을 돌아보는 것을 이야기하셨는데요. 코로나 시기에 그분의 미라클 모닝을 함께하며 강박적으로 자기 계발에 온 힘을 쏟던 시간이 떠올랐어요. 그때부터 '성장'을 키워드로 내건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지만, 정작 제 내면은 점점 더 지쳐갔고 멈추기 어려웠어요.
번아웃을 겪고, 도파민에 휘둘린 결정들이 제 길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참 다행히도 저만의 삶의 리듬을 찾게된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장'이라는 단어가 많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성장이라는 말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거에요. 누군가에겐 끊임없는 성취와 발전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겐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그동안 전자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고요. 하지만 제 진정한 자아는 삶이라는 포트폴리오의 균형과 시공간적 자율성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알게됐어요.
그래서 저만의 방식으로 '성장'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가기로 했어요.
- 소셜 미디어에 작업물을 공유할 때는 수치보다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용기를 축하하기
- 과거 연봉이나 타인의 성과와 비교하는 대신 내면의 창의성을 발견하고 키워나가는 데 집중하기
- 강박적인 목표설정에서 벗어나 매일의 작은 노력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힘을 신뢰하기
- 순간의 성취감보다 꿈을 향해 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
최근 이동진 평론가의 인터뷰에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말이 제게 깊은 위로가 되었어요. 정말 소중한 것들은 숫자로 측정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매일 한결같이 제 자리를 지키고, 꾸준히 창작하며, 완벽하지 않더라도 용기 내어 세상과 나누는 것처럼 말이죠. 모두가 앞으로만 달리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저는 꾸준함과 시간이 가진 힘을 믿으며 천천히 제 방식대로 성장해보려 합니다.
이 달의 편지는 조금 무거운 주제를 담았지만, 늘 마음 한켠에 있던 생각들을 수야님과 나누고 싶었어요. '성장'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수야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지 궁금해지네요!
P.S.
최근 <아티스트 웨이>에서 제안한 미디어 디톡스 일주일을 시도했어요. 콘텐츠 소비를 줄이면서 생긴 시간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활동들을 하게 됐고, 정신적인 해방감도 느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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