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수야님,
벌써 일 년의 반을 향해 다가가고 있네요. 뉴욕은 올해 비가 참 많이 내리고 있어요. 덕분에 꽃과 나무들은 쑥쑥 자라 보기 좋지만, 비 오는 날 밖으로 나가길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조금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6월 편지는 카페에서 쓰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오늘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바람에 커피를 내려 집에서 쓰게 되었어요.
저는 6월에 한 가지 다짐을 했어요. 바로 새로운 수업이나 커뮤니티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건 제게 꽤 큰 결심이었답니다. 그동안 부트캠프, 온오프라인 수업, 커뮤니티 등 어느 정도 데드라인과 함께 책임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 활동들에 꾸준히 참여해왔거든요. 뭔가 계속 배우고 있어야 불안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달까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 제 삶에 빈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기보다는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싶고, 하나의 커뮤니티에 묶여있기보다는 직접 모임을 열어도 보고, 다양한 취미 모임이나 관심사 기반 이벤트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한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코워킹 멤버십을 취소하고, 심리적 부담이 큰 커뮤니티도 정리했어요. 여름에 듣고 싶었던 수업들도 가을로 미뤘고요. 왠지 모르게 후련하면서도 두근거리는 마음이에요.
최근 한국에 가면서 멈췄던 거절 챌린지도 다시 시작했답니다. 이 챌린지는 작년 잠깐 받았던 코칭 세션에서 알게 된 건데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이 대부분 생각에서 멈추는 이유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경우가 많잖아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이 챌린지는 거절을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꿈을 향해 노력하는 증거로 보자는 거예요. 거절이 조금은 덜 무섭게 느껴지지 않나요?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에요. 집 근처 카페에서 북 런칭 이벤트가 있었는데, 혼자 카페에 들어선 순간 다들 그룹으로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집에 갈까?' 망설이다가 '십 분만 더 있어보자' 마음먹고 책을 훑어보는데, 또 다른 혼자 온 분이 말을 걸어주셔서 한 시간 동안 책과 삶에 대해 신나게 수다를 떨게됐어요. 가끔 이렇게 거절 챌린지를 하다 보면 새로운 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요. 계속 두드려야 열린다는 말이 있듯, 저도 계속 이 문 저 문 두드려보려고요.
또 다른 작은 거절 챌린지로 CreativeMorning*이라는 커뮤니티에서 문장 수집 모임을 여는 호스트 신청서를 냈어요! 한국 밑미 커뮤니티에서 문장 메모 리추얼을 약 2년간 참여 중인데, 서로 문장을 나누고 선물하는 행위가 너무 좋아서 미국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문장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좋은 문장 하나가 때로는 위로나 영감이 될 때가 있잖아요.
작년에 아무것도 모르고 코워킹 공간에서 모임을 열었다가 노쇼도 많았고 신청자를 모으기도 쉽지 않았는데, 올해는 이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 네트워크의 힘을 빌려보려 해요. 진행이 잘 되면 테마가 있는 독서 모임이나, 수집한 문장으로 zine을 만드는 등 창작 활동도 함께 해보고 싶은데... 일단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해보자 다짐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한 권의 책에 빠져있어요. 우연히 반 고흐의 삶과 관련된 영상을 보다가 그가 남긴 600통 이상의 편지들이 궁금해져서 책장에 묵혀져 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거든요. 수야님은 반 고흐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실지 궁금한데, 솔직히 저는 예전에 천재 화가지만 미치광이의 이미지가 좀 강했거든요. 하지만 편지를 읽으며 반고흐가 예술에 대한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 글을 매우 잘 쓴다는 것, 엄청난 노력가였고 매우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를 새롭게 보게 되었어요.
게으른 완벽주의자로서 그림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기보다 그림 그리기를 회피한 경우가 많은 제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고요.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의 고민과 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을 백 년이 넘은 후에도 읽을 수 있다는 게 행운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많은 편지들을 모아 발행한 동생 테오 부인 요한나 반 고흐에게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의 최종 목표가 뭐나고 너는 묻고 싶겠지. 초벌 그림이 스케치가 되고 스케치가 유화가 되듯, 최초의 모호한 생각을 다듬어감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명확해질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는 것이 아닐까?
......
인물을 그리는 일은 몹시 내 마음을 끌지만, 난 그 기법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처음에는 실패도 많아 지우고 새로 시작해야하는 일도 많겠지만, 그러면서 점점 배울 것이고, 사물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시각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반 고흐, 영혼의 편지>
6월 내내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위의 문장에 많이 공감했어요. 스케치에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다듬어 원고를 써야 했는데요. 예전에 엄마의 어린 시절을 인터뷰해둔 기록에서 한 부분을 뽑아와 작업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글감은 있었지만, 그걸 어떤 관점으로 풀어낼지가 막막했거든요. 그런데 제 시선을 조금씩 녹여내며 여러번 다듬어가니까 점점 이야기가 살아나더라고요. 고통스러웠던 만큼 성취감도 컸어요. 이제 드디어 스케치 단계에 들어갔는데, 70년대 서울이 배경이다 보니 그 시대의 레퍼런스를 모으는 과정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랄까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만드는 빈칸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용기, 용기가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을 열어주는 순간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 삶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게 아닐까요.
비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네요. 이제 곧 무더운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아요. 수야님은 피서계획이 있으신가요?
비가 그친 브루클린에서,
코스모 드림
*2008년 디자이너 티나 로스 아이젠버그가 뉴욕의 크리에이티브들이 쉽게 모여 서로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열린 아침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된 커뮤니티. 이제는 글로벌 커뮤니티가 되어 세계 여러 도시에서 한 달에 한 번 아침에 열리는 무료 강연 모임, 온라인 재능 기부 모임, 뉴욕 및 몇개의 도시에서 시범운영중인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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