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올해 제 얼굴을 본 지인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해주셨어요.
"재열, 예전보다 얼굴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아요."
"진짜요? 그 얘기 올해 부쩍 많이 듣네~"
자주 들어서일까요? 저도 점점 거울을 보면 변화를 느낍니다. 달라진걸요. 실제로 마흔을 넘어서면서 불안감이 예전보다 줄었고, 근거 없는 걱정도 덜해졌어요. 하루하루를 조금 더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힘이 생겼고, 마음이 성숙해졌다는 걸 저 자신도 알기에 그런 변화와 약간의 중년다운 체중 증가(?)가 저를 후덕하고도 편안하게 만든 거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게요. 그렇게 평온해졌다고 생각한 해에, 동시에 저는 유난히 화를 많이 냈어요. 일하면서도, 사람들과 부딪히면서도 버럭 짜증을 내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단 말이죠. 돌아보면 올해처럼 이렇게 많이 누군가에게 정색하며 화를 낸 적이 없었던 것 같거든요. 평온과 분노가 한 해 안에 공존하는 이 경험은 제가 저를 바라볼 때, 상당한 혼란스러움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터놓을만한 편안하고도 지혜로운 어른들을 뵐 기회가 생기면, 늘 이 문제를 털어놓곤 했는데요. 의외로 대부분 비슷한 말씀을 해 주시더라고요?
"네가 마음이 평온해진 건 기질의 성숙이고, 화를 낸 건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별개 문제야. 누구라도 지치면 그렇게 돼. 에너지가 고갈되면, 성숙한 사람도 분노나 짜증을 낼 수 있어."
" 재열 군, 얼굴이 편안해진 건 재열 군 기본적인 성정은 한 뼘 성장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화를 많이 낸다는 건 지금 지친 '상태'라는 거지. 성정이랑 상태는 따로 보셔야 돼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의문이 풀렸어요. 아, 지친 상태가 만든 일시적 반응이었구나. 그 말씀을 들은 후로도 몇 번 더 화를 낼 일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전과 달리 화를 낸 제 모습을 자책하기보다, 그것을 신호로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나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상태가 문제구나 하고요. 왜 차가운 겨울날에 난방이 꺼지면 보일러 기계 자체가 고장 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기름이 떨어졌다는 신호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는 그게 유독 분노 쪽으로 나오는 사람인 거고, 내 마음과 몸이 지쳤다고 보내는 알림일 뿐, 내 인격의 결함을 드러내는 아니라고 받아들이게 됐죠. 물론, 제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서 정당하게 낸 화만 해당되는 거지만요. 이렇게 구분하는 눈이 생기니, 비로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었어요.바로 '자기 자비'에요.
예전에는 자기 자비라는 말이 되게 낯설었거든요. 이 단어 자체는 뭔지 알고 있었는데 뭐랄까 좀 제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안 괜찮은데 억지로 "괜찮아,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쉬어도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안 괜찮데도!)" 같은 힐링 멘트로만 들렸거든요. 뭔가 억지 긍정 같아서 마음 깊이 와닿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라고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사랑이누나
멤버십 구독자만 읽을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