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안녕하세요. 에디터 민정입니다!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네요. 다들 휴가는 다녀오셨나요? 저는 올해 봄, 조금 이른 여행을 다녀온 탓에 여름에는 따로 휴가를 다녀오지 못했어요. 전 어릴 때 여행의 맛을 잘 알지 못했는데, 서른이 넘어서야 사람들이 여행을 왜 가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그 변화의 과정과 이제는 놓아주고 싶은 저의 어린 날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민정의 가장 충만하고도 불완전한 이야기
여행은 아주 오랫동안 저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어요. 정확히 말하면 남의 이야기였죠. 여유롭게 가족 여행을 다닐 금전적 여유도 없었지만, 다 함께 하하 호호 어디론가 떠날 정도로 사이가 좋지도 못했습니다. 여름 휴가 시즌, 방학, 집안 행사 등등 적당한 시기에 맞춰 친구들이 해외로 나가는 동안, 저는 용돈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사실 그땐 '여행을 못 간다는 사실'보다는 친구들은 편하게 노는 동안 나만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는 상황이 저를 더 서럽게 했답니다. 고기도 씹어본 놈이 안다는 말이 있듯 여행도 다녀본 사람이 그 맛을 아는 것 같더라고요? 유난히 여행을 자주 다니던 친구에게 "여행이 뭐가 그렇게 좋아? 나는 딱히 가보고 싶은 나라도 없는데.."라고 물었던 날 "네가 안 다녀 봐서 모르는 거다"라던 친구의 대답이 그 사실을 조금은 짐작하게 했죠.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총 3명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함께 있던 단체 채팅방에 한 통의 메시지가 올라왔어요. 당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가 "내가 재워주고 먹여주고 다 할 테니 비행깃값만 들고 놀러 오라"는 제안을 한 거였죠. 대충 계산기를 두들겨 보니 50-6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단순히 여행에 필요한 돈으로만 본다면 소소한 금액일 수 있겠지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용돈, 교통비, 휴대폰 비용까지 해결해야 했던 제게는 거액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돈 없다 노래를 부르는 엄마에게 차마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요. 아마 제가 이 이야기를 했더라면 엄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을 보내줬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땐, 하루가 멀다 하고 곡소리가 나는 집안 분위기에 대고 아쉬운 소리를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죠. 결국 저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고, 저를 제외한 나머지 한 명만 일본행 비행기를 탔어요. 일본 곳곳에서 찍은 친구들의 사진이 SNS에 업로드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삼켰습니다. 하지만 이 해프닝 역시 기억에서 쉽게 잊혔어요. 여행의 맛을 몰랐던 저는 이번에도 일본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게 속상할 뿐이었거든요.
"우리도 해외여행 한 번 가볼까?"
지금의 신랑과 연애를 시작하고 몇 년 후, 지난날 친구가 건넸던 제안을 다시금 받게 됐어요. 큰돈은 아니지만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월급을 받게 된 저는 곧바로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던 사회 초년생들의 여행은 가장 저렴한 비행기표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 다들 아시죠? 매일 밤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다 저희는 가장 싼 새벽 비행기를 예매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애 첫 여권과 함께요!
드디어 고대하던 출국 날이 다가왔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늦잠을 자고 말았거든요. 다행히 아직 시간이 남은 상태라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 입고 공항으로 달려갔죠. 하지만 숨을 헐떡이며 겨우 도착한 공항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이륙 최소 1시간 전에 출국 절차를 마쳐야 하는데, 저희는 약 40분 전에 도착한 상황이라 들여보내줄 수 없다는 안내를 받았거든요. 신랑도, 저도 해외여행 경험이 없어 이륙 전에만 도착하면 탑승이 가능한 줄 알았던 거죠. 특가로 끊은 표라 돌아오는 수수료도 거의 없었습니다. 와, 어떡하지? 이대로 못 가게 되는 건가? 공항 벤치에 주저앉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더라고요. 좀 아쉽긴 하지만 울기까지 할 일인가? 스스로에게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았어요. 그리고 눈물의 의미를 직면하게 됐습니다. 그간 친구들이 새로운 나라를 경험하는 동안, 홀로 갈 수 있는 곳 하나 없이 남아 있었던 날들이 제게 꽤 깊은 설움으로 쌓여왔다는걸.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다고 했었지만, 가고 싶은 나라도 없다고 했었지만 실은 나도 여행의 맛이 너무 궁금하고 경험해 보고 싶었다는걸요.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겠더라고요. 기필코 이 여행을 가고야 말겠다! 당시 제게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잔액을 털어 가장 가까운 시간의 비행기를 다시 예매했습니다. 비로소 저도 해외여행 유경험자가 됐죠. 돌이켜 보면 살면서 한 여행 중 가장 영양가가 없어요. 첫 여행이니, 아는 게 없어 제대로 즐기지 못했죠. 게다가 휴양지였음에도 매일 날씨가 흐렸고, 딱히 흥미로운 스케줄 자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저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나도 다른 나라에 와봤고, 원한다면 또 올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제 안의 모든 결핍이 완벽하게 해소되었거든요. 심지어 제가 결혼할 당시 코로나가 한창 심각할 때라 신혼여행을 국내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어요. 서러웠던 어린 나를 정말 깨끗하게 놓아주게 된 거죠.
이후 저희 부부에게는 한 가지 목표가 생겼습니다. 우리 무슨 일이 있어도 1년에 한 번은 단둘이 꼭 해외여행을 가자! 다음 여행지를 고대하면서 열심히 살아보자!라는 목표요. 이제는 제 안의 서러운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에게나 전해 듣던 여행의 진짜 재미를 알게 됐거든요.
그리고 올해 11월, 저는 또 다른 내 안의 나를 놓아주려고 합니다. 이번엔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에 도전해 보려고 해요. 저희 엄마는 60세가 된 지금까지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했는데요. 그 사실이 신랑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끽하다가도 울컥울컥 저를 찌르는 가시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엄마는 이런 데 한 번도 못 와봤을 텐데. 엄마도 이런 걸 먹어보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제게 은근한 죄의식을 심어주기 시작했죠. 그래서 언젠가 한 번쯤은 엄마와 함께 여행을 가겠노라 다짐만 했던 걸 넘어서, 이번에는 실행에 옮겨보려고 합니다. 사실 엄마가 여행을 다니지 못한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탓이 아닌데 나만 행복하다는 미안함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꼭 가야겠어요. 여행 한 번 못 가본 우리 엄마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런 엄마를 딱하게 여겨 힘든 나를 위해서요. 그렇게 서러웠던 어린 날의 나를 잘 놓아주었듯, 엄마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품은 나도 이제는 완전히 놓아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 받아 울고 있는 내가 있지는 않나요?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니 그 아이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보세요. 큰 목소리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저는 "어릴 때 명절마다 예쁜 한복을 입는 사촌 동생이 내심 부럽고 샘났다"라는 기억을 찾고서 다음 결혼기념일엔 한복 스냅 사진을 찍어 보기로 했거든요! 어쩌면 붙잡고 있는 마음을 마주하는 것, 그 자체가 놓아줌의 시작일 지도 몰라요. 구독자님도 아팠던 지난날의 내가 있다면, 부디 그 아이와 따뜻하게 작별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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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오 민정님 늦잠잔 날에 소름이 쫘아악 돋았다는 부분에서 같이 소름 돋았습니다. 첫 해외여행인데 늦잠이라니!!ㅠㅠ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ㅠㅠ 게다가 결국 이륙을 못했다는 부분에서 또르르 흐르는 눈물도 이해되었어요. 나의 과거에 내가 하지못해서 지금까지 계속 생각나는 것은 어떤게 있을까 고민해봤는데 바로는 안 떠오르더라고요, 저도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서 이번 한 주는 틈날 때마다 생각해보면서 나의 과거를 찾고 그 과거와 인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민정
비행기를 타지 못했던 날..! 새벽에 눈뜨자마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 그때 이후로 여전히 이른 새벽 출발 비행기는 절대 끊지 않고 있답니다..🥹 과거의 결핍들을 찾아내서, 어른이 된 내가 그 결핍들을 채워주는 거! 생각보다 정말 보람 있고 즐겁더라고요ㅎㅎ 도로시님도 크고 작은 아쉬움들을 발견하신다면 어린 나를 꼬옥 안아주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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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민정님 모녀 여행 저도 작년 겨울에 처음 해봤어요. 오랜 숙원 사업 같기도 했던… 생각보다 더 소중하고 뜻깊었던 엄마와 단둘이 하는 겨울 오사카&교토 여행! 여행 내내 제가 엄마의 보호자가 된 듯한, 저에게 모든 걸 의지하며 혼자 척척 해내는 딸을 대견해하고 여행의 순간 순간을 만끽하는 엄마의 모습에 저도 행복했어여. 지금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풍요로워 지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민정님도 엄마와 소중한 추억 만들고 오세요 :)
민정
앨리스님은 이미 다녀오셨군요! 저는 사실 엄마와 단둘이 가는 여행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신랑과 시어머니를 동반하기로 했어요☺️ 다행히 신랑은 저희 엄마와, 저는 시엄마와 합이 아주 잘 맞거든요! 아직 다녀오진 않았지만, 저 역시 다른 나라에 갔을 때의 엄마를 상상해 보면 저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져요. 모든 게 처음이라 엄청 신나할 것 같기도 하고요ㅎㅎ (처음 전동 킥보드 탔을 때도 엄마가 엄~청 소녀처럼 즐거워했었거든요!) 완벽한 둘만의 여행은 아니지만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걱정되는 부분들도 분명 있지만 잘 다녀와 보겠습니다💗 이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꼭 레터로 남겨봐야겠어요 -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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