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그리고 구독자 혹시 덕질 해본 적 있어? 주변에 물어보면 답이 극과 극으로 갈리더라. 아예 그 감정을 모르겠다는 사람과 한순간도 덕질을 멈춰본 적 없는 사람으로. 난 후자야. 그것도 할 말 많은 덕후. 오늘은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TMI가 쏟아질 예정이라 양해를 구하며 시작할게.
오늘은 영화 <성덕>에 대해, 내 덕질에 대해 얘기할 거야. 영화를 보는 내내 어찌나 입이 근질근질하던지. 성덕 GV가 매번 성토의 장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 이유를 단번에 납득했어. 원래 영화가 본인의 삶과 맞닿아있을수록 가슴 안에 맺히는 상이 막 부풀어 오르거든. 영화 속 장면에 내 삶 속 순간을 하나씩 대보는 거야. 아마 이번 편지도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 영화처럼 나의 시간을 돌아보며 잠시 우수에 젖었다가, 현실 속에서 눈을 번뜩 떠버리는 것. 마냥 '즐거웠다'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 유쾌했던 <성덕>처럼 이야기를 풀어봐야지.
S#1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어떤 문장이 우리의 덕질을 완벽히 표현해줄까,,, 거듭 고민하다 정해봤는데 어때? 어느 단어에 하이라이팅 하냐에 따라 뜻이 크게 달라져. 좀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 Btw 이번 신에선 나를 구원해준 덕질의 순기능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영화 속에서 조연출 다은 씨는 이렇게 말해, "아무리 현실 세계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혼나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괜찮다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면 난 정상의 궤도에 사는 사람이 된다"라고. 맞아 난 쪼르르 도망가 구호소 같은 품 안에서 끄덕이며 위로받았던 것 같아.
노래 가사에 위로받고, 트위터에 남겨준 140자에 감동하고, 자그마한 2G폰 배경 화면에 사르르 웃으며 말이야. 나도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시간표와 학생증을 꾸미고 책상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어. 그땐 그게 애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길이었고, 학교 안에서 '소속'을 밝히는 방법이었지. 학기 초 같은 '소속'의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친해졌던 기억이 나. 낯가리느라 새 학기가 두려웠던 나에게, 덕질은 친구를 만들어준 셈이지.
사실 끈덕지게 오롯이 몰입하는 일은 쉽지 않아. 좋아하는 감정 담뿍 담아 대상에 몰두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지. 억지로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경험도 아니고. 그만큼 덕질은 행운 같이 다가와. 누군가는 평생 느껴보지 못할 감정을 알게 되는 거니까, 행운 맞지?
감독은 덕질을 하며 처음 해본 것이 많다고 해. 서울행 기차에 올라탄 것도, 공중파 방송에 나와본 것도, 또 전교 1등을 해본 것도. 이외에도 그와 함께한 추억 속엔 수많은 '처음'이 있다고 했지.
위 내레이션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끄덕였어. 나도 매번 이야기하거든, 덕질은 내 세계를 넓혀주었다고. 새로운 시도 전에 돌다리를 수백 수만 번을 두드리는 겁쟁이인데, 덕질 앞에선 심드렁하게 곧장 다리에 뛰어올라. 거듭 곱씹을수록 신기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마다 그랬다는 게.
여기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TMI 연대기를 짚고 갈게. 보다 보면 참 유난이다 싶을 수도, 아님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오세연 감독은 영화까지 만들었는데, 편지에 풀어놓는 거야 뭐. (괜찮겠지?)
1) 중학생 때 처음으로 케이팝 아이돌에 빠졌어. 이땐 다들 소속이 하나씩은 있었잖아. 동네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 드림 콘서트를 가겠다며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었지. 문자로만 이야기하던 팬카페 친구도 만났어.
서울은 내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고, 인터넷 세상과 바깥세상의 괴리를 살갗으로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 같이 모여 응원법을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주술 행위 같은 콘서트가 나랑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이전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도 왠지 수줍어 손뼉만 치다 왔는데, 이 콘서트를 기점으로 노래방 플로어를 장악하는 사람이 되었지. 아직도 이 시절 메들리와 함께 노래방을 만끽해. 09~11년 케이팝을 즐겼다면 이해할 거야.
2) 최애는 쌓인다는 말이 있지. 나에겐 새로운 최애, 그것도 중국인 최애가 생겼어. 그가 출연한 중국 방송을 찾아보고 가사를 외우며 생각했지. '언젠가 팬 사인회에 가서 중국어로 대화하고 올 거야.' 이 사소한 결심은 결국 내 전공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치게 돼. 난 중문과를 전공했거든. 자연스레 탈덕했지만 아직도 고맙게 생각해. 내 밥벌이에 도움을 주다니, 참으로 쎼쎼.
3) 난 유행을 따라잡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습성이 있어. 그래서 자연스레 2017년 방영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성적 시청자가 되었지. 이땐 머리가 좀 커서 그런가 스케일도 따라 커지더라. 처음으로 밤샘 방청도 해보고 카메라에 스쳐 지나보고 진심 담긴 편지도 써보고 2차 창작물도 제작했거든.
그가 출연한 컷을 모아 보정 계정도 돌려보고, 일명 팬들 사이에 바이럴이 될만한 짤도 만들어 보며 말이야. 신기하게도 이때 학점이 가장 높았다? 난 아무래도 덕질을 해야 흔히 말하는 '갓생'을 사는 것 같아. 결국 이 시간들 덕에 나의 '어도비' 활용 능력은 급성장할 수 있었지. 덕질이 쌓일수록 능력 카드를 하나씩 적립하는 느낌이네.
+ 그리고 이건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었는데🤔
난 최애 덕에 길고양이 동아리 활동도 했어.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지만 말이야...황당하지? 당시엔 그저 최애가 사랑으로 키우던 고양이처럼, 세상의 모든 고양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맡은 구역의 고양이 삼형제를 위해 비 쫄딱 맞으며 밥 주고 오던 길. 평생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야.
누군가는 한심하게 여길까 봐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했는데, 이야기하고 나니 후련하다. 감독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S#2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뭐야, 제목이 같네? 나태하고만. 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하이라이팅이 다르잖아? 영화 <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망친 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 덕질의 명과 암이 있다면 이제 '어두운' 장면에 대해서도 털어놓고 싶어.
영화 속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느끼는 혼란이 그대로 전해져. 내가 응원하고 돈을 썼던 그들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다니. 나도 어찌 보면 그 행위에 동조한 것 아닐까?라는 죄책감이 밀려와. 이와 동시에 매 순간 나를 위로하고 행복하게 해주었던 때를 떠올려. 형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우리를 뒤덮지. 내 인생을 촘촘히 구성한 시간들을 뻑뻑한 지우개로 문대는 기분이었어. 분명 지워야지 하면서도 찢겨나가는 종이를 보며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리는 거야.
나는 특히 최애가 그렇게도 아끼던(?) 고양이를 유기했다는 뉴스를 보고 크나큰 트라우마가 생겼어. 난 모든 고양이를 아끼게 되었는데, 넌 어찌 그런 짓을 한 걸까. 이 시간을 기점으로 한동안 '연예인' 덕질을 중단했었어.
이러한 세계를 경험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 어쩌면 '일시정지'를 위한 경종을 울려준 걸지도 몰라. 좋게 보자면 삶에 대해 하나 배우긴 했네.
부디 그들이 평생 죗값을 치르며 살길.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아니 안 웃기지. 덕질은 습관인가 봐. 영화 <성덕>에 나온 인터뷰이들은 대부분 새로운 최애를 잡았고, 또다시 사랑에 빠져있어. 그것도 한없이 행복한 얼굴로 말이야!
사실 나도 그랬어. 난 인물 대신 영화 덕질에 푹 빠졌어. 독립 영화를 보며 내 좁디좁은 시야를 넓혀갔고, 오로지 영화가 좋다는 이유로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봤어. 아마 아르바이트 하면 주어지던 무료 티켓 혜택을 가장 많이 사용한 건 나였을 거야. 스케줄 근무였는데, 네 시간 전에 도착해서 영화를 무조건 두 편은 보고 업무를 시작했거든.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혀. 하지만 이렇게 흘러 흘러 영화제 자원 활동도 해보고 그때 만난 친구들과 여전히 영화 얘기를 하고 있어.
다시 느꼈지. 역시 덕질은 내 세상을 또 한 뼘 넓혀주는구나!
결국 난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다 못해 논문까지 써버렸어. 이미 세 번 이상 본 드라마지만, 논문 쓰며 초 단위로 훑고 나니 가슴이 충만해지더라. 이외에도 영화와 관련된 경험이 많지만 쓰다 보니 끝없이 늘어놓게 되어 조금 줄여볼게.
S#3 과연 난 성덕이 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도 계속 되뇌어, 과연 성덕이란 무엇일까? 성공한 덕후란 무엇일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해, 본인이 행복하다면 그게 성덕이라고. 실패와 성공의 기준은 누구나 다르니까.
물론 우리는 한번 크게 데였기에 계속해서 의심을 품긴 해. '믿음의 벨트'가 느슨해진 거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성덕'의 상태를 유지하기 쉬워졌어. 상대를 응원하고 사랑을 주되, 적당한 선을 찾아 유지하며 과정을 즐기는 거야.
가끔은 그들에게 쏟는 시간이나 애정으로 인해 무언가를 놓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난 이로 인해 위로를 받고 가끔은 눈에 생기가 돌기 때문에.
영화를 보며 내가 덕질을 하는 뒷모습은 어떨까, 문득 궁금해졌어. 나도 저렇게 웃고 있을까? 눈이 반짝반짝 빛날까? 다음에 만났을 때 꼭 알려줘. 내 모습이 어땠는지. 몰입한 내 모습이 궁금하면서도 마주하기 두렵긴 하다.
난 아마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멈출 수 없을 거야. <성덕>에 나온 모든 이들처럼! 이왕이면 우리 모두 별 탈 없이 덕질을 이어나갈 수 있길.
From. N
신기하게도 내 새로운 최애는 애묘인이야.
약간 불안해도 아직은 행복해.
혹시 내가 덕질을 쉬고 있다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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