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

하지만 이순신은 있다. 다수와 소수의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란체스터 법칙'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3.04.28 | 조회 1.26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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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노트

당신의 삶에 양념 같은 지식을!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할 때 '그런 것'들을 전해 드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들 중에 가장 오래 된 책이 뭘까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손자병법'이나 '도덕경'일 것 같습니다. 두 책 모두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략 기원전 500년 즘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손자병법을 처음 읽었던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그 때 이 책을 읽었던 건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상대한 이순신 제독의 신출귀몰한 전술 같은 것이 나와 있을 걸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손자병법엔 초등학생이 흥분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대신 경쟁에 임할 때 새겨 들어야 할, 성인에게 더 와닿을 말들이 있습니다. 신출귀몰한 전술 얘기보다는 '웬만하면 싸우지 말고 싸워야 한다면 싸우기 전에 미리 이겨 놓고 싸워라'라는 내용이 주가 됩니다. 

이런 손자병법의 정신이 잘 담긴 문장이 '적군보다 10배의 병력이면 포위하고, 5배의 병력이면 공격하고, 2배의 병력이면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고, 맞먹는 병력이면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적보다 적은 병력이면 도망치고, 승산이 없으면 피한다.'라는 구절입니다. 13척의 배로 133척을 이겨낸 건 분명 대단한 업적이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게 칠천량 해전 같은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됨을, 나아가 임진왜란 같은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했어야 했음을 손자병법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소수로 다수를 상대한다는 건 정확히 어느 정도 불리한 일일까요? 예를 들어 500명으로 1300명과 싸우면 그래도 500명은 죽일 수 있는 걸까요?

한국 1짱도 9대1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법칙이 '란체스터 법칙'입니다. 영국의 항공공학자 란체스터가 발견한 이 법칙은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다수와 소수의 전투가 어떤 결과를 맺게 되는지를 수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란체스터는 세계 대전의 공중전들을 분석하며 이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란체스터 법칙에는 '란체스터 선형 법칙'과 '란체스터 제곱 법칙'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모두가 칼을 들고 좁은 길에서 만난 상황이라면 란체스터 선형 법칙이 적용됩니다. 이 경우 한 사람씩 서로를 죽여 나가기 때문에 500명은 적군 500명과 교환됩니다. 따라서 500명이 전멸했을 때, 1300명 진영 역시 500명이 죽어 800명이 남게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총과 같은 무기를 들고 넓은 평야에서 싸운다면 란체스터 제곱 법칙이 적용됩니다. 500명이 500발의 총알을 쏘는 동안 1300명은 1300발의 총알을 쏩니다. 500발의 총알은 1300명에게 분산되는 반면, 1300발의 총알은 500명에게 분산됩니다. 이 상황을 미분 방정식으로 놓고 풀어보면(혹시나 식을 유도하는 방법이 궁금한 수학덕후는 이곳에서 확인하세요.), 500명이 전멸될 동안 1300명 쪽은 800(1300 - 500 = 800)명이 남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많은 1200(1300^2 - 500^2 = 1200^2)명이 남게 됩니다. 500명이 고작 100명만 죽이고 전멸당하는 것입니다.

드라군 10기와 8기가 컨트롤 없이 싸울 때, 2기가 아니라 7기가 살아 남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법칙대로라면 10^2 - 8^2 - 6^2이므로 약 6기가 살아 남아야 하니 얼추 란체스터 제곱 법칙에 맞는 예시라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대다의 회전에서는 병력의 차이가 단순히 뺄셈을 했을 때보다 훨씬 뼈아픈 결과를 불러옵니다. 그러니 손자병법의 조언대로 불리한 상황에선 가급적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서도 싸움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어떡해야 할까요? 먼저 란체스터 법칙의 전제를 깨버리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위 설명은 머릿수 이외의 조건은 동일한 경우를 전제합니다. 양이 적더라도 질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갖는다거나, 상대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기습을 펼쳐 일방적인 공격을 가한다거나, 보급을 끊어 상대가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든다거나, 심리적인 공격을 가해 싸울 의지 자체를 꺾어 버린다면 란체스터 법칙을 단순하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더 멋진 방법은 란체스터 법칙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500명으로 1300명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100명씩 쪼개어 13번 각개 격파한다면 란체스터 법칙에 의해 346명이 생존한 채 승리할 수 있습니다(500^2 - 100^2 = 490^2, 490^2 - 100^2 = 480^2... 13차례 반복.).

이런 원리는 전쟁 뿐만 아니라 전쟁을 닮은 많은 분야에서 적용됩니다. 현대 축구 전술의 기본적인 고민은 '공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순간적으로 수적 우위를 만들어내는가'입니다. 현대 농구의 모든 전술은 '한 명의 공격수에게 순간적으로 수비수 두 명을 붙이는 것'과 '한 명의 수비수가 있는 공간을 순간적으로 두 명의 공격수가 노리는 것'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대5로 싸움이 진행되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기동력을 활용해 순간적인 2대1 상황, 3대2 상황을 만들어내 적 하나를 먼저 제거하고 5대4 승부를 유도해내는 것이 핵심적인 전략입니다(5대4 승부는 란체스터 제곱 법칙에 따라 3대0의 결과를 유도합니다.). 위의 드라군 10기 대 8기의 전투 영상에서도 만약 8기를 사람이 컨트롤 했다면 상대 드라군을 1기씩 일점사하여 전투 결과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순신 제독이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상대한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실제로는 전함의 질, 지휘관의 능력,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 등에서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란체스터 제곱 법칙을 적용하면 13:133의 싸움은 0:132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신 제독은 넓은 바다에서 싸워주지 않고 울돌목이라는 좁고 조류가 매우 빠른 바다에서 싸웠습니다. 이 때문에 133척을 동시에 마주하지 않고 각개격파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에는 이순신 제독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전공들만 생각 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순신 제독이 위급한 상황에서 보인 기지 뿐 아니라 위급하지 않을 때 미리 위급할 때를 준비하는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전투가 없을 때에 이순신 제독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전쟁 물자를 비축하는 데 힘 썼습니다. 싸우기 전에 미리 이기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고 불리한 싸움을 피할 수 없을 땐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울돌목의 지리 조건을 명량 해전의 승리 요인으로 꼽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것은 이순신 제독 자체 아닐까요? 처참한 상황에서도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오니'라고 말하는 결연함, 그 열두 척의 배마저 도망치려 하는 상황 속에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버티는 정신력, 본인은 모함을 받더라도 묵묵히 그 억울함을 견디면서 부하들의 공에 대해선 머슴 한 사람의 이름까지 기록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게 한 멋진 리더십까지, 도무지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4월 28일, 이순신 제독의 탄신일을 기리며 오늘의 페퍼노트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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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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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1
    over 1 year 전

    (박수)

    ㄴ 답글
  • 빔일

    1
    about 1 year 전

    이 편도 재밌네요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전장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도 궁금해지네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텐데 말예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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