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 세계와 충돌합니다. 생각과는 다르게 이슬람 세계는 강력했습니다. 오랜 세월 지켜온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기독교 세계에 퍼져 나갑니다.
그러던 중 1145년, '연대기'라는 책을 통해 기독교 세계에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아시아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세운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기독교 초창기에 갈라진 분파로, 이단으로 몰려 유럽을 떠나야 했던 분파입니다. 이 기독교 왕국의 왕은 '사제왕 요한(또는 '프레스터 존')'이라 불렸습니다. 그는 예수가 탄생하고 찾아왔던 3명의 동방박사 중 1명의 후손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중 사제왕 요한은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티그리스 강이 불어나 끝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1165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사제왕 요한의 편지가 도착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희망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이슬람과의 전쟁은 어렵게 흘러 가고 있었지만 이슬람 세력의 동쪽에 기독교 국가가 있다면, 그래서 이슬람 세력을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다면 승리도 먼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동방의 사제왕 요한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직접 사제왕 요한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13세기 어느 날, 기독교인들의 부름에 응답하듯 새로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동방에서 온 세력에 의해 이슬람 세력이 초토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드디어 사제왕 요한의 군대가 이슬람 세력을 쳐부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쾌재를 부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사제왕 요한의 군대가 기독교 세력인 동유럽까지도 개박살을 냈기 때문입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낀 유럽인들은 이 무자비한 군대가 바로 몽골군이며 사제왕 요한의 군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제왕 요한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제국 통일 이전 케레이트 부족의 마지막 족장 옹 칸이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인도에 사제왕 요한의 기독교 왕국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주목 받은 것은 에티오피아였습니다. 이 시기에 기독교를 믿어 온 지역으로 흔히 유럽만을 떠올리지만, 의외로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위치한 에티오피아도 오랫동안 기독교를 믿어 온 국가였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이 에티오피아가 바로 사제왕 요한의 왕국이 아닐까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항해왕자'라 불리는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는 국가의 미래를 이 사제왕 요한에게 걸어봅니다. 이슬람 세력에 의해 실크로드가 꽉 막혀 아시아와 교역을 하는 게 불가능했던 포르투갈이 사제왕 요한에게 도움을 받고자 아프리카를 빙 도는 모험을 시작한 것입니다. 유럽과 인도의 직항로를 개척한 것으로 유명한 바스쿠 다 가마에게는 엔히크 왕자가 사제왕 요한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라는 임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와의 접촉을 통해 알게 된 건 그 역시 사제왕 요한의 왕국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제왕 요한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차차 사제왕 요한이 그저 전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글 또한 감정이입을 통해 마치 사제왕 요한이 실재했던 것처럼 기술하였습니다만, '연대기'에 실려 있었던 이야기도 낭설이었고 마누일 1세에게 도착한 편지도 위조된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데르 3세의 편지는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한 세계가 있지도 않은 존재를 오랫동안 믿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실재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유럽인들이 십자군 전쟁에서 희망을 가졌고, 유럽과 인도의 직항로가 개척되기도 했습니다. 믿음은 때로 큰 힘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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