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트럭에 부딪혀서 죽었다' 같은 결말은 현실에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창작물에서는 함부로 사용했다가 독자들의 원성을 사기 딱 좋습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창작물보다 현실에서 오히려 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역사에서 '이게 진짜란 말야?' 하는 사건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 알아볼 '에르푸르트 똥통 참사'가 대표적입니다.
하인리히 사자공은 신성로마제국의 귀족으로 막대한 영지와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진 귀족은 눈엣가시가 되는 법, 결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게 공격당해 잉글랜드로 쫓겨나고 맙니다. 그의 넓은 영지는 황제에게 회수되어 황제를 지지했던 귀족들에게 다시 분배됩니다.
그런데 영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튀링겐 방백 루드비히 3세와 마인츠 대주교 콘라드 1세 간의 분쟁이 발생합니다. 이 둘의 분쟁은 2년 남짓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이 둘의 갈등에 대해 듣게 됩니다. 하인리히 6세는 폴란드 왕국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이 둘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던 에르푸르트에서 비정규 회의를 소집해 둘 사이를 중재하고자 합니다.
신성로마제국 전역의 귀족들이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에르푸르트에 도착했습니다. 이 회의는 페테르스부르크 성 내 마리엔슈티프트 대성당의 2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2층 바닥이 많은 귀족들과 그 수행원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에 많은 귀족들이 1층으로 우수수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1층 바닥도 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그렇게 수많은 귀족들과 수행원들은 지하에 있던 화장실 배수로, 말이 좋아 배수로지 당시 양식 상 똥통이나 다름 없는 곳에 떨어집니다.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명확히 이름이 기록된 귀족은 6명입니다. 이들을 포함해 약 60여 명의 귀족과 수행원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회의를 열었던 하인리히 6세와 갈등의 당사자인 마인츠 대주교 콘라드 1세는 벽돌창 근처에 앉아 있었던 덕에 낙하를 피했고 사다리를 통해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또다른 갈등의 당사자인 루드비히 3세의 경우 똥통에 빠지긴 했으나 운 좋게 구출되었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사망자들은 대부분 이 회의에 참석하려고 멀리서 왔다가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훗날 하인리히 6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라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를 포로로 잡는 등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데, 만약 이 때 같이 똥통에 빠졌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강성한 국가의 귀족들이 어이 없는 사고로 한시에 목숨을 잃고 만 사건. 억울했을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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