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88] 🌻 진짜 새해는 음력 1월 1일부터입니다

설 연휴가 물러간 평일에 편지를 부치는 숑🌻입니다. 안전하고 평온한 명절 보내셨나요? 한파가 여전히 기세등등한데 건강하게 일상으로 복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연휴가 저물어가는 무렵부터 기왕의 평일을 맞이하는 일을 영영 유예하고만 싶었답니다. 2023년이 시작된 지 3주나 흘렀지만 저는 사실 2022년 12월 50일쯤을 살아가고 있었거든요.

'진짜 새해는 음력 1월 1일부터!'를 외치며 마음가짐에 있어 본격적인 시동 걸기를 줄곧 미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됐네요. 연말연초, 조금 이른 설 연휴까지 이어진 게으른 기운을 털어내고 잠자던 노를 깨워보려 합니다. 저와 비슷한 분이 계셨다면 우리 함께.. 이제는 진짜 최종 리얼 새해를 맞이해봐요!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이런 제 마음을 담아 출퇴근길 신중하게 고른 노래들로 꾸려봤습니다. 레터를 발행하는 오늘은 음력 1월 5일! 새로운 해의 마음가짐을 슬금슬금 끌어올리기 딱 좋은 날이군요. 당장의 날씨는 춥지만 머지않아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스트레칭하기 좋은 계절이 오겠죠. 그날까지의 체력을 비축하듯 이 노래들을 함께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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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 - Starlight

TMI로 시작하자면, 이 노래는 내가 9년째 사용하는 음악 어플에서 알려준 ’가장 많이 재생한 곡‘이다. 뮤즈의 노래들은 대체로 내면의 전투력을 툭툭 건드린다. 언젠가 선동가요(!)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신곡을 콜리🥦가 소개한 바 있다. 나 역시 뮤즈 특유의 선동력 가득한 분위기를 좋아해서 한창 면접 보러 다니던 취준생 시절 가장 즐겨 들었다. 흡사 든든한 사촌과 환불 원정대를 꾸려 백화점으로 향하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위풍당당해진다.

그에 반해 <Starlight>는 뭐라 해야 할까. 어딘가 선동력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한결 순한 맛이다. 듣고 있노라면 별빛처럼 반짝이고 건전한 의욕이 내면에 은은하게 피어오른다고 느낀다.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1-2-1-3” 박자에 맞춰 규칙적으로 튕기는 드럼 소리에 맞춰 가슴이 벅찬다.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처음처럼 설렌다. 누군가에게 <Starlight>을 소개할 때 나는 항상 ‘내게 등대 같은 노래’라는 설명을 빼먹지 않는다.

다시금 의욕에 불을 붙여야 한다고 느꼈을 때 이 노래가 떠오른 건 필연적이었다. 9년간 가장 자주 들은 노래여서가 아니라, 정말 모든 상황에 잘 어울리니까. 출근길이라면 정직하게 둥둥둥둥 이어지는 ”1-2-1-3“ 드럼 박자에 맞춰 발걸음을 옮겨보자. 절로 씩씩해질 것이다. 퇴근길에 들으면 하루 끝 피로가 쌓인 어깨를 누군가 힘있게 쥐어주는 듯 서정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 노래에 빚지게 될까?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 Aqua - Cartoon Heroes

아쿠아(Aqua)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그룹이다. 정확한 장르를 찾아보니 '유로댄스 혼성 팝 그룹'이라고 하는데, 덴마크 영화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만난 것이 그룹 결성의 시초였다고 한다. <Barbie Girl>, <My Oh My> 등, 그들이 90년대 발표한 대부분의 곡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우리나라에서도 싸이월드와 예능 프로, CF의 BGM으로 흔히 쓰였기에 모두가 듣자마자 '아!' 할 만한 노래들이다.

그 중에서도 2000년 발매된 <Cartoon Heroes>는 왜 이리도 묘하게 연말, 겨울 느낌이 그득하던지 몇 주째 귀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제목은 물론 도입부의 희망찬 분위기, 만화 속 영웅들이 귓바퀴를 뛰어노는 듯 생생한 노랫말까지 너무나 흥겹다. 혼성 그룹 노래를 들을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코요태, 쿨의 노래를 즐겨 듣던 시절처럼 은근한 추억에 빠져들기도 한다.

일종의 길티 플레저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최근 내 루틴을 공유해본다. 요즘의 출근길은 당장 의욕에 장작을 가져다대는 노동요보다 주로 이 노래를 첫 곡으로 고르며 시작했다. 무채색 복장을 두르고 무표정한 얼굴로 헤드폰을 낀 여성을 상상해보자. 모두가 비슷한 온도로 흔들리고 있는 지하철에서 현실의 고민을 잠시 밀어두고 언젠가 날 설레게 한 만화 속 장면을 떠올리는 일이란! 매일이 비슷하게 느껴졌다면 바로 내일 아침에라도 시도해보길 추천한다.

🌻 Eric Clapton - Reptile

최근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에 대해 쓴 책을 읽고 있다. 내가 아는 달리기는 헬스장에서 열심히 러닝머신 뛰던 시절 3~4km 내외를 짧게 내달린 기억뿐이다. 책에서 말하는 달리기는 최소 10km, 길면 마라톤 풀코스에 해당하는 42km로 내게 있어선 ‘초’ 장거리였다. 감히 체감되지 않는 육체의 소진을 활자로나마 가늠했다. 세 시간이 넘게 쉴새없이 뜀박질을 한다고! 체력은 당연하고 대체 어느 경지의 정신력일지.

과거 내가 러닝머신 위를 뛸 때 주로 골랐던 노래는 후렴구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밴드 음악, 처음부터 끝까지 중간 약도 없이 강강강으로 몰아붙이는 거센 음악이었다. 마라톤처럼 장거리를 달릴 땐 무슨 음악을 들을까 궁금했는데, 책의 중반쯤 하루키가 '달리면서 듣기에 어느 쪽이나 흠잡을 데 없는 음악'이라며 추천한 앨범이 바로 에릭 클랩튼의 [Reptile]이었다.

처음엔 재즈 매니아로도 유명한 작가이기에 달릴 때도 느긋한 취향을 고수하는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 재생목록에 넣고 틈틈이 들을수록 이것 참 달리기에 적합한 곡이 맞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규칙적으로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에릭 클랩튼의 유려한 연주만큼 자연스러운 보조는 찾기 드물 테다. 귓가에 흐르는 음악만으로 주변 공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느낌. 괜찮은 컨디션으로 아침을 맞이할 때의 그 산뜻함.

어쩌면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이 이와 비슷해도 괜찮겠다. 차근히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적당한 템포로 달려나가는 것. 올해의 스타트 라인에 서서 전력으로 달릴 생각에만 빠져있다면 봄도 채 지나지 않아 지쳐버리지 않을까? 한 해의 결승선은 훨씬 저 멀리 있는데. 거창한 각오보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통과하는 동안, 이 노래는 탁월한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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