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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나의 죽음은 오직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본래적인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인간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떠올리며 유한자임을 깨닫고 그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찾기 위해 결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나의 죽음의 중요성에 몰두하느라 타자의 죽음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블랑쇼는 ‘나는 나의 죽음을 절대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까지 죽음에서 돌아선 채 “삶을 향하여” 있는 죽음. 침착하고 절도 있는 방식으로 살아있는 자들을 감동시키는 죽음. 이 고귀한 죽음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의 순간을 예의바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끝까지 인간적 품위를 지키려는 삶의 욕망이 있을 뿐이다.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속에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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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환상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1940)에서 주인공은 복잡한 이유로 원고를 벽난로에 태운다. 그러나 악마는 그게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원고를 꺼내와 읽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원고는 불타지 않는 법입니다.”
나중에 불가코프의 전기 제목으로도 사용된 이 인상적인 어구는 소설보다도 유명해져서 맥락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석되고는 한다. 인간의 정신적 창조는 어떤 수단으로도 억압될 수 없다는 식으로. 그런 취지에 반대할 수야 없지만 이 어구는 좀 더 개인적인 뜻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원고를 태웠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는 고백으로 말이다. 불가코프는 이미 이 소설의 초고를 한번 불태운 적이 있다. 당국의 거듭되는 출판금지 조치로 발표 가능성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소설을 다시 쓰면서 이 구절을 넣은 것은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것 아닐까. 결국 자신은 불태운 것과 똑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 불에 탄 원고는 그런 식으로 멀쩡히 다시 돌아온다는 것. 그렇게 보면 “원고는 불타지 않는 법”이라는 말은 과거는, 또는 인생은 취소할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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