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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이 저 일화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무조건적인 굴복을 읽어낸 것과 달리, 키르케고르는 공포를 강조한다. 신앙은 나의 실존을 파괴할 수도 있고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다. 신앙은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세속의 휴머니즘과 공포 사이의 도약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그 도약은 세속화된 교회가 약속하는 위안이나 안락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으며, 그런 것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신앙은 교회나 목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독자로 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사유란 알고자 하는 욕구나 진실 추론과는 달리 세상의 복잡한 경험 속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행위이다. 사유하지 않으면 맹목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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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탄에 잠긴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신(神)조차도 바꿀 수 없는 ‘과거’가 있고 과거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가버린 아이들이 남겨준 ‘과거’는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그 살아있는 ‘과거’를 정중히 위로하고 슬픔의 유대를 통해 나눌 수 있다면 비극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에게 위로의 말은 공허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굳이 전하고 싶습니다, “부디 오래도록 살아주세요”라고. 여러분의 아이들이 부모님들에게 메시지를 남긴다면, 분명 그렇게 쓸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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