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
#
『구의 증명』은 제가 삼십대 중반에 쓴 소설입니다. 시간이 흘러 그 소설이 사랑을 받으니, 한편으로는 그때 그 소설을 썼던 과거의 나에게 고맙다는 말보다는 ‘너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너는 잘하고 있었던 거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라는 눈빛을 전해주고 싶어요.
작가란 하나의 직업이면서,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평범한 일상과 가치들을 다른 사람들보다는 한 번 더 살펴보고 곱씹어볼 수 있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면서 사유하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 사유하는 시간도 중요하고요. 글을 쓰면서 깨우친 일상의 소중함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왜 글을 쓰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거든요. 제 안에 먼저 답이 있었던 게 아니라,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뒤늦게 깨달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 나는 글쓰기를 통해 많은 것을 해소했구나.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더 많이 방황하고 나를 더 지독하게 미워했을 것 같다는 깨달음이요. 그런 과정이 일상의 저를 보살핍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저는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삶’ ‘죽음’ ‘애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가 ‘사랑’인 것 같아요.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소설에서, 저는 그 가치를 지키고 싶습니다.
#
다음 단어는 ‘philosophos’다. 역시 피타고라스의 조어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지혜의 탐구자다. 나중에 본인이 철학자로 알려지는 니시 아마네가 일본 메이지 시대에 ‘philosophy’를 철학(哲學)으로 번역했다. 지금은 대학교의 전공으로 좁혀져 있으나 원래는 세상의 원리와 이치를 탐구하는 모든 학문을 지칭했다. 그래서 지금도 전공과 무관하게 박사학위명은 ‘Doctor of Philosophy’다. 뉴턴의 탐구도 과학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는 자연철학이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이상적 도시를 위해 필요한 지도자가 지혜의 탐구자(philosophos)였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단어의 지칭 대상이 변화하면서 이 지도자도 엉뚱하게 철학자, 즉 철학 전공 학자로 오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덩달아 플라톤까지 실없는 고대의 철학자로 인식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역의 문제를 걷어내면 플라톤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의 지도자는 지혜로운 자, 혹은 지혜의 탐구자여야 한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