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돌아온 수요일의 이종철, 수종철입니다. 오늘도 심각한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는 않고요. 요즘 제가 하는 생각들을 적어놓습니다.
여러분은 과거 한식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아시나요? 아래의 짤에 친절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30년 전 떡이 지금 떡과 같지는 않겠지만 주로 물컹하고 식감이 이상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하죠. 떡뿐만 아니라 제 기억으론 김밥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습니다. 물론 30년이면 입맛들이 많이 바뀌었을 겁니다.
그런데 현재 뉴욕에는 치폴레 식으로 한식 반찬을 퍼주는 레스토랑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네요. 말이 치폴레지 반찬 떠주는 거 보면 구내식당, 아니 조금 더 강하게 말해볼까요? 함바집이랑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가격은 한 서너 배쯤 하고요.
어쩌다 보니 관광객이 많이 오는 동네에 사는 제 입장에서는 참 신기한 일입니다. 갈비나 삼겹살 가게에 외국인이 있는 걸 보면 놀랍지 않은데, 청국장 파는 저 학생 때부터 있던 노포는 대체 어떻게 찾아오는 걸까요.
다른 사례는 대구 음식을 들고 싶네요. 이미 프리미엄콘텐츠 때 한 번 다룬 주제니 짧게 말하겠습니다. 대구에서 자란 저는 모든 대구 음식이 전라도 음식에 비해 맛이 없는 걸로 알고 자랐습니다. 실제로 전라도에 가보면 맛없는 반찬이 없고 반찬을 퍼부어 주니까요. 그런데 어느새 대구는 (저는 모르는) 맛집 도시가 되어 있었고요. 맵고 짠 게 트렌드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요즘 유행하는 대구 음식들 맵고 짜지도 않아요. 어린 시절만 대구에서 보낸 저에게 음식을 추천하라고 하면 짬뽕류(중화비빔밥, 야끼우동, 그냥 짬뽕)만 추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면까지 간이 잘 배어 있어서 맛있습니다. 나머지는 뭐 서울에서 먹나 똑같아요.
이외에도 제가 A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보니 B고, 0이라 인식하던 것들이 1인 일들이 요즘 수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매체(AI)가 쉬워지니 원래부터 지식으로 먹고 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폭발적인 강제 인식 개선이 벌어지는 겁니다. 네가 지식으로 먹고 살았어? 하시면 음 죄송합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진짜일까? 내가 진리라고 믿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특정인들의 에너지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닐까? 기운이 모이면 없던 맛 에너지나 멋 에너지가 발생해 인간들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와 비슷한 이야기네요. 하지만 저는 네오처럼 굉장한 존재가 아니라 네오의 벡터 배경에 존재하는 주변 인물이라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가는 것뿐이겠죠.
이외에도 몇 가지 사건을 보며 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에서 언급한 짬뽕 이슈를 다시 이야기해 보죠.
울릉도에 갔을 때 짬뽕을 먹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 대구의 맛이 그곳에 살아 있었기 때문이죠. 대구에서는 신규 가게들은 대부분 그런 맛을 내지 못하고, 울릉도에서도 두 집 중 한 집만 그랬는데요. 대구에는 노포가 많고 유명 가게들이 있으니 그런 맛을 찾아내기 어렵지 않지만 타 지역에서는 찾기 어렵습니다. 더 맛있다기 보다는 추억의 맛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짬뽕을 먹고 나면 항상 후기를 찾아봅니다. 그런데 후기에는 대부분 불맛 이야기밖에 없어요. 불향 외 현대의 짬뽕 맛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그리고 그런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제 일인데 제 불찰이군요). 불향은 좋은 맛입니다만 내기 어려운 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과거 짬뽕의 맛은 수식할 단어가 있는가? 그 추억은 진리의 맛일까 하면 그것도 아닐지도 모르죠.
그럼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실은 영국 음식도 맛있는 게 아닐까(설마). 내가 예쁘다고 믿고 있었던 얼굴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건 아닐까. 나는 사실 별로인 사람이 아닐까? 외모와 더불어 특히 실력이. 후자는 아니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이 글을 굳이 구독까지 하고 있는 여러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요.
타인을 두고 그럴 순 없으니 저를 도마 위에 놓고 세포 단위로 쪼개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인생의 안정성, 신체의 건강, 기세, 옷을 좋아하는 성향, 입맛, 요리 솜씨, 사람에 대한 취향 모두 거짓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취향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안목과 함께 성장하게 되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이 함께 만드는 겁니다. 입맛도 마찬가지겠죠. 저의 복식도 지역적 특수성을 기반해서 자라났습니다. 모든 것은 세상의 숨결이었지 오로지 제 손으로 만들어낸 것이 얼마나 있을까 하면 잘 모르겠네요.
취향과 안목, 성향, 성공의 조건 등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나가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그런데 그것들이 요즘처럼 타인을 공격하는 데 쓰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슨 거지가 어떻고, 집단과 집단을 나누고,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들린다면 곤란해지는 거겠죠.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인간을 공격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안 그랬냐고요? 그랬을 겁니다.
저는 취향에 맞지 않다고 해서 배척하는 성격의 사람이 아닙니다만, 만남이 힘들어지면 관계를 슬쩍 밀어놓습니다. 그런데 그 가벼운 이별도 혹시 잘못된 것이라면?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공기 속에 포함돼 나도 모르게 이별 버튼을 눌렀던 것이라면요?
해결책으로 사회를 바꾸자 이 정도의 말은 할 수 없고(저는 그럴 주제가 못 됩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해결책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취향도 지식도 타인에게 온 것이고 그것이 오염되었을 소지가 있다면 저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해답은 충동이었습니다. 충동을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학습이 배제된 환경에 놓였을 때, 처음 보는 복식과 의식, 음식과 취향에서 정해진 걸 따라가지 말고 원초 그대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통념에 위배되거나 타인을 공격하는 수단이 된다면 충동 역시 접어둡니다. 충동 역시 학습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은 모든 게 처음일 때만 사용합니다.
두 번째는 상대, 장소, 문화에의 거부감을 밀어두고 시간을 두는 것. 충동과 배반하는 개념인 것 같지만 제가 적응할 시간도 줘야 하는 거겠죠. 싸울 생각을 하지 말고 릴스를 보듯 내버려두는 겁니다. 제 충동이 뒤늦게라도 반응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긍정적인 충동이 진실이고 부정적인 게 거짓이다라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두 가지를 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편견은 무엇보다 빠르게 작동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과거 젊은 시절의 제가 하던 것처럼 충동과 편견이 부딪힐 때 어떤 것이든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다소 주입식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겠네요.
무엇이 성공이고 얼마만큼 해야 잘 사는 것이고 하는 데 사로잡혀서 살다가 중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이 삶이 이렇게 불안한 건, 충동과 할 수 있는 것들, 혹은 해도 되는 것들(대체 누가 왜 허락해 주는지 모르겠으나)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오래 묵혀두다 충동으로 쓰는 글입니다. 저에게도 쉽지 않은 주제고 그러다 보니 문장도 많이 거칠게 됐네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다 충동에 도달했습니다. 실은 이 의심 자체도 세상이 만든 걸지도 모릅니다.
최근 이런 고민들에 사로잡혀 살다가 할 것을 못 하진 않고 다 했으면서 이 긴 고민을 여러분께 편지로 보냅니다. 늘 저를 취향으로 생각해 주신 여러분들께 그것도 잘못된 건 아니길 빌면서, 고민이 끝났으니 저는 다음 주 수요일에는 조금 더 얌전한 모습으로, 가끔 충동적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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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로트로키
미국식 함바집에서 먹는 함바그반찬은 함바함바그일까요. 저는 성공도 인정도 주목도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생존할 만큼만 성취하고 굶지 않을 만큼만 인정받고 존재감없이 주목받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삶이 서럽거나 처절하지 않을만큼 근근히 살만하기는 하길 바랬습니다. 꿈이 너무 거창했었죠. 다 실패했습니다. 생존은 얻는 것 별로 없이도 처절했고, 별로 성취하거나 쌓아둔 곳간도 없는데 온갖 빌런과 관종이 달라붙었고 지극히 개인적 일상까지 침해하려고 들었습니다. 이번 생의 목표는 확실히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돌아온 수요일의 이종철. 수종철입니다
살아만 있으면 됐다고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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