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독자, 상상해보세요. 글이 시각미술이 될 때, 그러니까 글에게 육화된 몸을 주었을 때. 혹은 글이 음악이 될 때, 글에게 말할 수 있는 소리와 리듬을 주었을 때. 글이 문자 그대로 텍스트로 전시장에 놓였을 때. 글이 번역되지 않은 외국어로 남았을 때, 글로부터 타자화되거나 오독된 채 서 있어야만 할 때. 글이 미술에 내재될 때, 둥둥 떠 있는 얼굴을 헤아리며 다 하지 못한 말을 떠올릴 때. 글쓰기로부터 출발한 열 명(팀)의 작가가 만든 세계-내-존재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 서로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쓴 흔적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언어-예술을 통해 공명합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글짓, 쓰는 예술≫은 글쓰기로부터 출발한 전시입니다. 전시 제목 '글짓'은 여러 형태의 움직임을 갖게 된 글의 몸짓을 의미하는 것으로, 작가의 몸을 통과해 전시장에 펼쳐진 글을 은유합니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예술을 마주하려는 시도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인공지능이 곧 모든 인간을 대체한다는 근미래에도 당장 우리를 연결하는 수단은 결국 언어일 겁니다. 서울익스프레스가 만드는 기이하고 으스스한 텍스트나, 이민선의 모호하고 흐릿한 텍스트 사이를 거닐어봅니다. 마치 종이처럼 얇고 흔들리는 불안한 우리의 초상이 중얼거리는 말 같아요. "지금이야! (아닌가)"


청각적 언어

차지량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그리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합니다. <꿈/깸>에 사용된 글과 이미지 조각들은 작가의 과거 작업에서 발췌되었습니다. 차용된 작품의 이름은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2019)', '선생님은 이곳에 없습니다(2022)'와 같이 이곳 또는 저곳, 여기 또는 저기를 떠도는 상태를 드러냅니다. 작가는 종양 제거 수술 이후 한쪽 귀의 감각을 상실했습니다. 그것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라기보다, 몸의 일부를 잊는 경험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감각의 균형이 어긋나자, 다른 방향의 감각이 증폭되었습니다. <꿈/깸>은 그 공백 속에서 감지한 미세한 노이즈의 기록입니다.
또다른 작품 <텅 빈 오케스트라>에서 작가가 쓴 소설은 인류가 쌓아올린 유무형의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공간적으로 작가는 미술관을 '텅 빈 기다림'의 공간으로 상정했으며, 시간적으로는 가까운 미래에서부터 먼 미래까지 이어집니다. 관객은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일지 모를 텅 빈 미술관을 찾아온 사람이자 영혼이 됩니다. 미술관 곳곳에 배치된 소리와 이미지를 따라 사라진 것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 미세하게 돋아나고 있는 것들을 함께 떠올려봅니다. 각자의 감각이 열릴 때까지, 각자의 속도로 머물며 새로운 예술이 발생하는 순간을 맞이해보세요.

시각적 언어

노석미는 자신과 주변의 친숙한 소재들에 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글과 그림이 같은 화면에 놓일 때, 텍스트는 의미로 읽히는 동시에 그 자체로 이미지로서 화면의 구성 요소가 됩니다. <텍스트 페인팅> 연작에는 어린이가 그린 포스터 그림처럼 삐뚤빼뚤하고 어눌한 글씨가 박혀 있습니다. 작가는 그리고 싶은 대상이 눈에 들어오는 심상의 찰나, 그 '빛나는 순간'을 생생한 그림으로 포착합니다. 빠른 붓질로 그려낸 그림에는 싱싱한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한편 이 텍스트와 이미지는 대개 서로 연관이 없이 단순하게 병치되어 있습니다. '설레이는' 감정과 폭포의 관계를 상상해봅니다. 메타포로 읽어내자면 생동하는 계절감과 폭포의 율동감이 시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요. 보다 사적인 기억의 흔적을 막연하게 더듬어보기도 합니다. 작가에게는 어느 날의 일상이었을 폭포 앞, 그 정경에 '설레이다'는 이름표를 붙이게 한 이는 누구일까요? 일기장을 들여다보듯 내밀한 생각을 공유받은 것처럼, 그 안에서 시적 언어를 가만히 탐색하는 것처럼 그 순간을 사색합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시각적 언어의 너머

안규철은 글짓기를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한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만한 작가입니다. 전시 및 저서 등을 통해 그림과 텍스트로 된 세계를 착실히 구축해 온 작가죠. 연필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작가가 하는 모든 일의 시작이자 중심이라고 합니다. 안규철의 글쓰기는 기록하고 성찰하는 방식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그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진실이라 말해지는 것들, 자신을 포함해 삶과 세계를 의심하고 질문합니다. 이 전시에서 그는 이 기록을 마음껏 펼쳐놓았습니다.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시구절, 전시장 벽에 씌어진 시구절, 캔버스에 중첩된 단어 또는 문장들이 적확한 의도에 맞춰 선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제시됩니다.
<외국어로 된 잠언>은 직관적인 형태로 제작된 작업입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온갖 나라의 말로 적힌 이 글자들을 모두 읽을 수 있는 관람객은 드물 겁니다. 읽히지 않는 문자는 소통의 한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자신의 언어를 떠나면 세계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이 이 작업의 의도"인데요. 그럼에도 텍스트를 이해하고 싶다면, 전시장 어딘가에 비치된 한글 번역본을 찾아보거나 구글 번역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통해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또는 필연적인 오독과 오해, 미련 속에서 어딘가에 있는 다른 삶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걸까요?


텅 빈 미술(관)에 울리는 글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기표로서의 언어는 결국 어떤 개념이나 의미인 기의에 가닿기 위한 경로입니다. 하지만 기표를 접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추상적 이미지는 모두 동일할 수 없으니까요. ≪글짓, 쓰는 예술≫은 텍스트를 매개로 가장 느슨한 형태의 이미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사이를 마음껏 경유하고 자신만의 미술(관)-세계에서 사유해보세요. 원 텍스트와 번역 사이, 번역과 오역 사이, 오역과 오독 사이, 너와 나 사이의 필연적인 실패와 머뭇거림 사이에서 감각의 리듬을 찾아가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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