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가 끝내 하지 못한 일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2026.08.06 | 조회 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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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개츠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개츠비는 죽었다. 데이지의 사랑도 되찾지 못했고, 그토록 되돌리고 싶었던 과거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그가 만들어낸 부와 저택, 화려한 파티의 주인이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뒤 소설을 덮었다. 그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개츠비가 정말로 끝내 하지 못한 일은 따로 있었다.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에게는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다.

제임스 개츠. 이게 진짜, 적어도 법적인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부모는 기력 없고 실패한 농사꾼이었다. 그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 만들어낼 법한 제이 개츠비란 인물을 창조했고, 끝까지 그 이미지에 충실했다.

  제임스 개츠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이 앞으로의 삶까지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개츠비란 이름 뿐만 아니라 말투와 태도, 옷차림과 생활방식까지 새롭게 만들었다. 제이 개츠비는 제임스 개츠가 언젠가 되고 싶었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개츠비의 자기 창조를 단순한 허영이나 거짓말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거부함으로써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실제로 만들어냈다. 과거의 자신을 떠나면서 그는 성공했다.

  제임스 개츠가 제이 개츠비를 만들었듯, 나에게도 내가 만든 존재가 있다. 바로 '벤자민'이다.

  벤자민이라 불리는 나에게도 물론 본명이 있다. 나는 한때 그 이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본명으로 살아온 내 삶은 평범했다. 때로는 볼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안에는 펼쳐내고 싶은 모습과 살아내고 싶은 삶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대개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그게 되겠냐?', '아.. 그래.' 와 같은 말을 직접 듣지 않더라도 표정과 말투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시선에 맞서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그들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꿈을 미리 부끄러워하고, 내가 바라는 삶을 스스로 과장된 것이라 여겼다.

  내 안에 들어온 그들의 시선이 나를 옭아맸다. 나는 점점 주눅 든 채 내 안에 갇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온몸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나를 펼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 녀석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버렸다. '벤자민'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개츠비'와 '벤자민'은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미래라고 믿었던 것

  젊은 군인이었던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사랑하는 여자 그 이상이었다. 부와 아름다움이 그녀를 아우르고 있다. 데이지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창조한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도 비로소 완성될 것 같았다.

데이지의 하얀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심장은 더욱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여자에게 키스하고 나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의 비전들이 곧 사라질 그녀의 호흡에 영원히 결부되고, 그의 마음은 이제 신의 마음처럼 다시는 유희와 장난의 세계에 머물 수 없게 될 것임을 알았다.

  데이지와 처음 입을 맞춘 순간, 개츠비가 품고 있던 수많은 가능성은 한 사람에게 묶였다. 이전까지 그의 미래는 여러 갈래로 열려 있었지만, 이제 데이지와 함께하는 삶만이 그가 도달해야 할 미래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개츠비는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 그 사이 데이지는 톰 뷰캐넌과 결혼했다. 군대에서 전역한 그가 데이지의 도시로 돌아갔을 때 데이지와 톰은 신혼여행 중이었다. 그가 미래라고 믿었던 삶은 실현되지 않은 채 과거가 되어 있었다.

  벤자민에게도 바라는 미래가 있었다. 나를 벤자민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어울림이었다. 해외는 내가 과거의 시선에 붙잡히지 않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였다.

  나는 그 미래를 이어가기 위해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계속 외국에서 살려면 직장을 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게 취업이란 생계 해결을 넘어 벤자민으로 계속 살아갈 자격을 얻는 일이었다. 나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처절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밤을 새워 짐을 싸다가 ‘BENJAMIN’이라고 이름 새겨진 기념품들을 발견했다. 나는 그 이름이 적힌 물건들을 꼭 쥐었다. 그렇게라도 벤자민을 잃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쓸쓸한 공항에는 쌉싸름한 새벽 향기가 났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 5시에 벤자민의 삶은 끝났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잃으며 자신이 꿈꾸던 미래를 잃었다. 나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며 벤자민의 미래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개츠비와 내가 한 선택은 달랐다.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개츠비는 자신이 꿈꾸던 미래가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충분한 부와 지위를 갖추면 지나간 미래도 되찾을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고 데이지의 집이 바라보이는 곳에 호화로운 저택을 샀다. 밤마다 성대한 파티를 열며 언젠가 그녀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개츠비의 이웃이자 데이지의 사촌인 닉의 도움으로 개츠비는 마침내 데이지와 재회했다. 그와 그녀는 다시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5년의 세월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톰과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개츠비가 알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왔다.

  개츠비는 현재의 데이지가 아니라 과거의 데이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 없이 살아온 5년을 통째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가 원한 것은 데이지가 톰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톰,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어."

 닉은 개츠비에게 말했다. "나라면 데이지한테 너무 많은 걸 요구하지는 않을 거야."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어."
 개츠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없다고?" "왜 안 돼? 돼! 된다고!"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돌려놓을 거야."

  데이지가 톰을 사랑한 적이 있다는 것은 개츠비에게 단순한 시기질투로 넘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믿어온 이야기와 다른 과거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데이지가 줄곧 자신을 사랑했다는 확신이 무너지면 그가 쌓은 부와 저택, 기다림까지 모두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개츠비는 데이지의 현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데이지를 되찾으려 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지키려 했다.

 

 

벤자민은 내 안에 있었다

  성장하기 위해 과거의 나를 버려야 하는 순간도 있다. 하나의 꿈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을 밀어내기만 해서는 새로운 자신도 완성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꿈을 미래의 자리에 계속 놔두면 그것은 더이상 나를 이끄는 힘이 아니라 거꾸로 잡아당기는 힘이 되어 버린다.

  개츠비는 과거의 제임스 개츠를 버린 덕분에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지를 향한 과거의 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더이상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없었다.

개츠비는 몰랐다. 자신의 꿈은 이미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헤아릴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는 과거를 돌아보며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진 사람이었다. 문제는 자신이 미래라고 믿었던 것이 이미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데이지는 다른 시간을 살았고, 첫 입맞춤에서 시작된 가능성은 이미 그의 등 뒤로 지나가 있었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것을 여전히 자신의 앞에 놓인 목표라고 믿었다.

  나도 한동안은 벤자민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해외로 나가 중단된 삶을 이어 사는 것이 나의 영원한 꿈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면서, 다시 해외로 나가는 것만이 벤자민을 되찾는 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나는 벤자민처럼 사고했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했다.

  벤자민은 내가 돌아가야 할 꿈이 아니라, 이미 내가 지나온 시간이었다. 그 이름으로 얻은 자유로움과 자신감,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벤자민으로 살아낸 시간이 본명의 나와 합쳐지며, 두 이름은 비로소 하나의 삶이 되었다. 나는 더이상 해외생활의 꿈을 열망하지 않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끝내 하지 못한 일

  개츠비는 끝내 데이지의 사랑을 되찾지 못했다. 그리고 끝내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끝마치지 못한 일은 과거의 꿈을 보내주고 다른 미래를 시작하는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삶을 보며 묻게 된다. 과거의 나를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지, 지나간 꿈은 언제 보내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시작할 수 있는지.

   개츠비의 생은 끝이 났지만 개츠비가 끝내 하지 못한 일은 지금도 독자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그 미완의 질문이 그를 오래도록 '위대한 개츠비'로 남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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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벤자민으로서 해외에서 어떤 생활을 했었을까요?
아래 글에서 살짝 엿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의 완독 인증

흔들리며 피어나는 꽃처럼 예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벤자민님의 문체와 글을 좋아하는데 오랜만에 읽어볼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네요. 글을 읽는 동안 생각의 깊이와 사유의 흐름이 제게 특별하신 분이라 삶의 활력이 됩니다.

벤자민님 잘 지내시지요?  여전히 마음을 담아 글을 매끄럽게 잘 쓰시네요. 매글이 완전한 에세이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내가 보기에 부족한 것 같아 보일지라도 글을 쓰는 순간에 내 마음을 온전히 담아서 썼다면 소중한 나의 삶을 녹여낸 글이라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오랜만의 벤자민 너무 반가워요 🫶🫶🫶🫶🫶🫶🫶

벤자민님 돌아오셔서 반갑습니다! 오늘 글에서 내용은 다르지만 저와 비슷한 고뇌가 느꺼져 공감되었어요. 느슨하더라도 오래오래 뉴스레터로 뵙고싶습니다~!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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