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의 시대, 작가의 마음가짐

이 글은 콘텐츠 업계에 올리는 상소문이자, 나 스스로에게 바치는 작가 정신 선언이다.

2025.09.18 | 조회 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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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벤자민

브런치북 <서른의 나는 세살의 나를 불러본다> 연재중


  이대로 가다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도 망한다. 책과 긴 글이 쇼츠와 릴스에 묻혀 사라지듯, 자극적인 숏폼들도 결국에 더 센 녀석에 의해 짓밟힐 것이다. 사람들의 문해력을 갉아 먹으면서 커가고 있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들과, 후킹과 자극을 강조하는 콘텐츠 업계에 강한 반발심이 든다. 틀림없다. 이대로 가다간 콘텐츠 시장은 다 폰*브(포르노 콘텐츠 플랫폼)에 잠식당할 것이다.

  어줍잖은 미끼로 독자를 낚아 먹을바에, 차라리 뻘밭 아래서 굶어죽는 게가 되겠다. 숏폼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보단, 어두컴컴한 진흙 속에서 구멍을 파고 버티겠다. 후킹이 아닌 문장으로, 자극이 아닌 사유로, 소비자가 아닌 동반자로 글과 독자를 대하겠다. 이 글은 콘텐츠 업계에 올리는 상소문이자, 나 스스로에게 바치는 작가 정신 선언이다.

 

책 읽지 않는 시대

  바야흐로 책을 읽지 않는 시대다. 2023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연간 독서량은 3.9권으로 2019년 7.5권에서 절반 가량 감소했다. 대신 사람들은 휴대폰을 본다. 2024년 8월의 와이즈앱 조사 결과, 한국인의 월간 유튜브 이용 시간은 약 1,174억 분(약 19억 5,600만 시간)으로 보고되었다. 한국의 전체 인구 수를 약 5,100만 명으로 가정하면, 1인당 하루 평균 약 73분의 유튜브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넘기는 맛이 있는 책 대신, 쇠맛만 나는 투박한 기계가 사람들 손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 끝없이 스크롤 되는 짧은 영상, 더 자극적인 짤들이 그 위에 떠다닌다. 이런 것들은 일종의 전동 드릴이 되어 사람들의 뇌를 박살내고 있다.

  나는 이 흔한 풍경 속에서 낯선 외로움을 느낀다. 분명 책은 여전히 인간 정신을 지탱하는 튼튼한 나무이다. 무엇이든 아낌없이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나무에 기대어 쉬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를 모두 불태워 없애 버릴 것만 같은 불꽃놀이 속으로 주저없이 몸을 던진다.

  밑줄 그어진 책 속 한 문장은 예쁜 이미지로 둔갑해 인스타그램에 올려진다. 그리고 그저 '좋아요'만 받고 사라진다. 난 참으로 궁금하다. 앞뒤 맥락 다 잘린채 돌아다니는 그 한 문장이 낳은 오해가 얼마나 많을지, 그렇게 '읽은 셈' 치고 눈길을 거두는 책이 얼마나 많을지.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한 작가의 깊은 사유를 온전히 따라가는 경험, 복잡한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능력,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는 마음. 이런 것들은 15초짜리 영상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의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힘은 점점 사라지고있다. 책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서늘한 두려움을 느낀다.

  책을 읽지 않는 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중대한 사안이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곧 정신의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마스카라가 번졌는지, 이에 틴트가 묻지 않았는지, 코털이 삐져나와있는지도 모른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책을 거울 삼아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다. 철학의 사유를 빌려와 나를 점검하고, 고전의 지혜를 불러와 다시 되새기며, AI등의 실용서를 통해 미래를 준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작가 지망생으로서 나는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독자를 잃은 시대에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길고 깊은 글 대신 짧고 얕은 글을 요구 받는 시대에 나는 어떤 문장을 건네야 하는가.

 

짧고 얕은 글 vs. 길고 깊은 글

  글쓰는 작가는 콘텐츠 생산자로서 두가지 길의 기로에 서있다. 첫번째로, 독자의 수준에 맞는 글을 쓰는 길이다. 짧고 쉽게, 눈길을 잡는 글을 쓴다. 단, 이 경우 독자의 눈높이를 맞춰야 하기에 작가의 사고력과 표현력은 더 숨겨진다. 작가가 스스로 '짜쳐'져야만 한다.

  둘째로, 독자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길이다. 작곡가들이 포맨 신용재와 씨스타 효린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작곡가가 곡에 담고자하는 의미를, 가수의 음역대에 국한되지 않고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도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다 글에 써낼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독자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 즉, '1옥타브 시'에 불과한 독자의 음역대를 '3옥타브 라'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글쓰기를 포함한 오늘날의 콘텐츠 시장은 독자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보다는, 독자의 수준에 맞추는데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나도 참 갈등이 많았다. 짧은 글, 쉬운 문장, 즉각적인 독자의 반응. 이 요소는 글쓰는 사람으로서 정말 유혹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백하건데, 나 스스로도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뉴스레터 홍보 목적으로 숏폼 플랫폼인 스레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짧은 글의 즉각적인 반응을 직접 경험했다. 뉴스레터에서는 얻기 어려운 수백명의 팔로우가 몇 주만에 생겼고, 몇 개의 게시물은 1,000의 조회수를 금방 넘겼다. 긴 글을 쓰고자 하는 동기가 반감 되었다. 나는 짧은 글을 여러개 발행하면서 얻은 얕은 기쁨에 잠시 도취되었었다.

  실제로 글쓰기 팁이랍시고 들려오는 이야기는, '짧게 써라', '쉽게 써라', '후킹한 제목을 써라' 이런 것들이 대다수다. '작가 본연의 색채 넣기', '진정 말하고 싶은 이야기 쓰기'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좋아요, 댓글, 바이럴에 최적화된 글쓰기만 난무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일단 발견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일단 읽혀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말도 일리 있다. 솔직히 나도 허상의 1만 독자를 찾아다녔다.  단 1명의 진실된 독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가 몇 안읽은 에세이 중에서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를 재미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쭉 읽었거든요. 그 책의 한 챕터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한 독자의 <친숙함에 깃든 성스러움>  감상평

  진짜 독자를 만나고 나니, 나의 글쓰기를 이어가는데에는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다는걸 깨달았다. 딱 한 명에게만 발견되어도 된다, 딱 한 명에게만 읽혀도 된다. 단 한 명의 진실된 마음에 닿으면 된다. 그러면 1만명의 허상의 독자는 사라지고, 나를 알아봐주는 오직 그 한 명을 위해 쓰게된다. 나의 색채를 잃지 않게된다. 그렇게 글쓰기를 이어가다 보면, 향기에 이끌린 나비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거라 확신한다.

  내가 쓴 에세이 중 최초로 1,000 조회수를 기록했던, <친숙함에 깃든 성스러움>은 아무런 자극과 후킹이 없다. 정말 재미없는 글 중 하나이다. 그저 숏폼에 오염된  마음의 평화를 지키려고 썼던 글이다. 오직 나의 입맛에만 맞춰 조용히 긴 호흡으로 정성을 다해 쓴 글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글이 '의도'했던 다른 글 보다 훨씬 반응이 좋았다. 감사하게도 이 글에서 찐팬이 여러명 생겨났다. 이 때 진심이 담긴 글쓰기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짧게 써라', '쉽게 써라', '후킹한 제목을 써라'라는 조언에 더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후킹은 흑마법이다

  후킹(Hooking)은 마치 물고기가 갈고리에 걸리듯이, 독자의 눈길을 잡아끌기 위해 감정을 자극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며 클릭을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처음에는 이것을 단순히 일종의 전략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잘못 사용하면 큰일 나는 일종의 흑마법이다.

  후킹이란 흑마법은 모두에게 악영향을 준다. 먼저, 작가에게 해롭다. 작품성 높은 글을 썼다고 치자. 후킹을 적용하면 자극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오직 클릭만을 위한 제목이 지어진다. 이를테면, <노력? 셧더퍽. 갓생? 셧더퍽.>, <좀비딸 vs. AI딸, 당신의 선택은?> 이 있다. 내가 독자의 클릭을 일부러 의도하고 지은 제목이다. 사실 이 에세이의 부제목이 내가 처음 짓고 싶었던 제목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두번째로, 독자에게 해롭다. 후킹있는 제목을 자꾸 보다보면, 자극의 역치가 높아져서, 웬만한 제목에는 별로 읽고 싶은 욕구를 못 느낀다. 날이 갈수록 도를 넘는 기사 제목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유명 연예인이 아기를 낳는다고 해서 화들짝 놀라 기사를 클릭해보면 작중 맡은 어머니 역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후 어떤 방어기제가 생겨서 웬만한 인터넷 기사는 눌러보지도 않게 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양치기 소년처럼, 아무리 자극적인 제목을 갖다 놓아도 독자는 시큰둥해질 것이다. 하물며 후킹 요소가 하나도 없는 양질의 글들은 어떻겠는가. 결국 좋은 글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독자에게도 좋지 않다.

  후킹은 독자를 자극의 노예로 만들고, 글을 단순 소비의 도구로 전락시키며, 깊은 사유의 가능성을  차단시킨다. 더 나아가 콘텐츠 시장 전체를 좀먹는다. 글 뿐만 아니라, 예능, 드라마까지, 이런 자기 파괴적인 트렌드 속에 있다.

 

문해력 논란의 진짜 원인

  약 2025만년 전, 인간은 꼬리를 잃었다. 2025년 현재, 인간은 점점 '문해력'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층의 문해력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OECD에 주관한 2023 국제성인역량조사에서 한국 성인 언어능력 점수는 249점(500점 만점)으로 OECD 평균 260점보다 낮았고, 10년 전 조사보다 23점 하락했다.

  하지만 이 문해력 부족이 과연 청소년과 청년만의 잘못일까? 이들의 문해력이 이토록 박살이 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성세대의 일부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신세대의 문해력을 갉아먹고 돈방석에 앉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콘텐츠 시장은 더 빠르고, 더 자극적이며, 더 단순한 것을 추구한다. 긴 글을 읽는 인내심은 퇴화하고, 한눈에 들어오는 자극만을 쫓는다. 책 속의 글 덩어리 들은 똥 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점점 외면당한다.

  세상에는 점점 불량식품 같은 더 짧은 글, 쉬운 글만 남게 되었다. 양질의 글을 접하기가 어려워졌다. 사유의 즐거움 보다 클릭을 유도하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글만이 청소년과 청년의 주위를 돌고 있다. 자극적인 콘텐츠만 계속 보면 읽는 힘은 현저히 떨어지고 문해력 가난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읽는 힘이 사라진 세대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단편적 지식과 자극 속에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몇 세대 후에는 문해력 논란이 아니라, 단체 문맹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읽는 사람이 없어지면 쓰는 사람도 없어지는게 당연한 수순이다.

  콘텐츠 업계는 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망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출판업계가 겪고 있는 난항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도 차례차례 겪게 될 것이다. 정말 마지막에는 자극과 후킹만을 범벅한 그런 쓰레기 같은 콘텐츠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결국 세상은 썩은 내가 진동하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황폐화 될것이다.

 

책임소재는 누구에게 있나

  독자를 피해자로 상정한다면, 제1 책임자는 삼류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유튜버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될 수록 돈이 된다."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조회수 경쟁이 도를 넘으면서 쓰레기 같은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다.

  솔직히 이런 것들에게는 크리에이터라는 이름도 아깝다. 그냥 쓰레기를 생산하는 어그로 꾼일 뿐이다. 막말 콘텐츠 위에 극단적인 제목을 얹어 유통시키고 이득을 취하는 파렴치한 족속들. 자극의 역치를 한도끝도 없이 올려놓는 놈들. 출판 시장 뿐만 아니라, 콘텐츠 시장 전체를 좀먹는 해충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것을 꼭 크리에이터 개인의 문제라고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데에 개인의 도덕적 문제도 있지만, 수익 구조가 이를 종용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유튜브의 수익 구조를 보면, 조회수와 체류시간이 직접적으로 수입과 연결된다. 깊이 있는 장편 콘텐츠보다는 빠르게 소비되는 자극적 콘텐츠가 경제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은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게 된다. 구조적으로 길고 깊은 콘텐츠가 도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즉, 유튜브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일부 주(State)의 부모와 학교가 메타(Meta, 구 페이스북)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청소년을 인스타그램에 최대한 오래 머무르게 하여 수익을 높이려 함"이 핵심 주장 중 하나이다. 여러 소송과 논문은 공통적으로 '체류시간에 기반한 수익 구조'를 지적하고 있다.

  콘텐츠 크리에이터, 콘텐츠 플랫폼 외에도 여러 책임자를 열거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작가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양질의 글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라, 독자의 수준을 끌어올려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시대의 작가는 글을 써내고 마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통해 독자를 함께 성장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콘텐츠를 선별할 수 있는 힘, 길고 깊은 글을 읽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거다. 작가는 익충으로서 마땅히 콘텐츠 생태계 전반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독자와 글쓰기 환경을 반드시 지켜야한다.

 

작가의 의무와 윤리

  현실적으로, 책은 영상에게 절대 이길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롱폼은 절대 숏폼에 이길 수 없다. 이 불리함을 일단 이해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콘텐츠 대 콘텐츠로 맞붙으려고 해서는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이다.

  대신 작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숏폼에 속박되어있는 대중의 눈을 책 쪽으로 돌려놓을 수는 있다. 더 나아가 책 읽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삶에 얼마나 큰 풍요를 가져다 주는지를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독자가 책을 읽도록 직접 유도하고, 콘텐츠 리터러시 수준을 한 껏 끌어 올려주어야 한다.

  단순히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도록,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돕는 것, 나는 이를 이 시대의 작가 윤리라고 본다. 한 문장, 한 문단씩 독자가 사유의 근육을 키우도록 도우며 독자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것이 작가가 감당해야 할 의무이다. 그저 "책 읽어라"고 말만 하지 말고, 컨텐츠 업계의 낮은 수준에 마냥 맞춰주지만 말고, 우리 작가가 독자의 문해력을 직접적으로 끌어올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바로 독서모임 <한줄>이다. <한줄>은 단순한 독서모임이 아니다. 매일 한 줄 이상의 책 문장을 읽고, 본인의 생각을 기록하도록 한다. 그 한 줄로부터 사유가 시작된다. 독자는 책으로부터 창발된 스스로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주하며 사고의 폭을 넓힌다.

  그리고 일주일마다 꼭 책 속 한 문장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해보게 한다. 책이 실생활에서 주는 효용 가치를 몸소 느끼게 하는 전략이다. 단순히 읽고 마는 독서가 아닌, 함께 실천하며 성장하는 독서를  지향한다. 한 줄 씩 꾸준히 읽고 실천하며,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모임이다.

   나는 오히려 낮은 자세로 먼저 독자와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을 것이다. 독자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작가와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가 되어야한다. 책의 세계로 친절히 안내할테니 함께 읽고 실천해보았으면 한다. 이 작은 마음을 모두 모아 무너진 독서의 세계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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