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잠이 오지 않는 밤, 같은 순간이 또 온다면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용기 낼 수 있을까? 나는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지킬 수 있을까? 하릴없이 고뇌의 밤을 여러 날 보내온 사람은 안다. 어떤 방법을 써도 그때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시간여행은 그저 기억으로만 가능하다는걸.
겨울이었는지 깊은 가을이었는지 입김을 후하고 불면 모양이 그려지는 많이 추운 날이었다. 동생이 백일이라고 했으니 나는 네다섯 살쯤 됐겠다. 날렵하고 가느다란 갈색 롱부츠에 승마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갈색 스카프로 색을 맞춘 여인이 내 앞에 서 있다. 차림으론 분명 패션리더였을 아름다운 여인이 한참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아름다운데 너무 낯설었다. 그 여인의 품에서 하얀 털 뭉치로 뒤덮인 갓난아기가 울음소리를 내자, 나한테 있던 시선을 이내 거두고 아기를 얼러댔다. 그러자 나는 몹시 그 아기가 부러워졌다.
그녀의 난처하고 당황한 기색은 얼굴의 근육들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며 시작됐다. 엄마는 낯선 모습을 하고는 나를 보고도 웃지 않았다.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러면 품 안에 동생은 작정이라도 한 듯이 또다시 울어댔다. 동생이 좀 얄미웠다. 나랑 얘기할 시간도 주질 않았다. 난 어려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귀는 이미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숨소리도 다 셀 수 있었으니까.
얼마쯤 지났을까? 내 뒤에서 내 온몸을 진저리 치며 들썩거리게 만드는 굉음이 들렸다. 이별의 순간이다. 난 사실 아까 그 표정에서부터 눈치챘다.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무서운 얼굴을 한 남자가 내 팔을 잡아당긴다. 아빠다. 동생처럼 엄마에게 붙어 있으려면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 머리를 써라 머리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어이없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절대로 울면 안 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한 그때, 하늘에 빛이 번쩍거리며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 차려보니 택시 안이다. 불그락 푸르락 화산 같은 아빠의 얼굴이 무서운 나는 훌쩍거림도 멈추었다. 그날은 부부 싸움 후, 폭력을 못 견딘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나간 현장을 잡은 날이다. 그 장소에 아빠가 나를 데리고 나갔다. 집에 들어올 수 없다는 엄마의 답에, 다시 화가 난 아빠는 우는 내 뺨을 때린 것이다. 뺨을 맞은 후의 기억 일부가 지워졌다. 며칠 후 다행히 엄마가 동생과 함께 들어오시며 비극은 끝났다.
그때 이후로 아빠는 더 이상 내게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화가 날 땐 천둥처럼 일갈하셨다. 천둥은 번개가 친 후 몇 초 이내에 천둥이 친다는 예고를 동반하지만, 아빠의 일갈은 예측할 수 없어 늘 불안했다. 게다가 평소엔 거의 말씀이 없으신지라 그 간극을 적응하는 게 어린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아빠 앞에서는 절대 울어 선 안된다. 아이가 우는 소리를 꽤나 싫어하셨다. 내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늘 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아빠는 소리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빠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때가 많았다. 그럴수록 오히려 자동 반사 격으로 걸핏하면 눈물부터 나는 사람이 되었다. 눈물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현상이라고 일러주었다면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우는 법을 배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울지 않은 척 연기하며 억지웃음을 짓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6살이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예쁜 밤, 달빛 조명 덕에 하얀 눈밭이 새벽처럼 훤히 빛났다. 다행이었다. 어두웠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나는 팬티만 입은 채로 쫓겨났다. 조금 전의 상황으로 가볼까? 요리를 제법 잘하시는 엄마가 따뜻한 저녁을 한 상 차려 네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빠도 우리도 좋아하는 굴비구이를 바라보며 모두 행복해하는 중이었다. 굴비구이는 나도 유일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생선이다. 오감이 민감한데 비위까지 약한 나는, 다른 생선은 유독 비린 맛에 속이 울렁거려 손도 못 덴다. 그에 비해 굴비는, 비릿함보단 고소한 풍미가 가득해서 가장 좋아하는 생선이다.
그때였다. ‘에 에취!’ 엄청난 데시벨의 굉음이 밥상과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생각하기도 전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너무 놀랐다. 순간, 아빠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뇌가 잘 못 반응한 것이다.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고 할수록 자동 반사 신경은 눈치 없이 존재감을 뿜어댔다. 훌쩍임도 멈출 수가 없었다. 밥상머리에서 울었던 나는 죄인이 되어 ‘눈 쌓인 추운 바깥’이라는 감옥에 ‘팬티 죄수복’만 입혀져 수감됐다. 6살 여자아이의 죄명은, ‘밥상머리에서 운 죄’였다. 그날 저녁은 나로 인해 엉망이 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우는 죄’를 싫어하게 됐다. 왜 눈물부터 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울지 않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이상한 건, 그 와중에도 눈물에 흐려진 눈이 너무 예쁘게 반짝거렸다. 그 아름다움을 깨닫는 순간, 추운 것도, 외롭고 창피한 감정도 눈물을 타고 흘러 눈 위에 뚝뚝 떨어졌다. 눈물에 구멍이 생긴 눈밭엔 나의 흔적이 뚜렷이 남았다. 억울한 죄수인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다.
내가 기억하는 범위에서 아빠는 나를 안아 주신 적도, 손잡아 주신 적도 없다. (나의 유전자는 아빠의 유전자와 거의 일치한다. 친아빠가 맞다.) 원래 아빠들은 다 이런가 보다 했다. 자라서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 아빠가 친구와 눈 맞추고 웃어주고 장난치며 목말을 태워주는 모습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친구 아빠는 친구를 바라볼 때, 표정부터 달랐다. 자상하게 웃으며 친구가 무슨 장난을 해도 무례하게 생각지 않을 만큼 너그러워 보였다. 타인을 통해 ‘다정함’이라는 단어를 처음 떠올리게 된 순간으로 기억된다.
아빠에 대한 기억의 용량을 현실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정(80)>긍정(20)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빠를 미워하지 못했다. 무서운 공포의 대상은 감히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든다. 자라면서는 신앙적 기조에 의해 아빠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빠를 위해 기도하며 울었던 적이 있지만,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아빠에 대한 마음 정리가 어려운 채로 20대를 보냈다.
어릴 때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늘 몸을 움츠렸다. 드러내기를 늘 주저했다. 상을 받으러 나가는 자리에서도 부끄러웠다. 주목받는 일이 어려웠다. 소리 내 울지 못했다. 목소리도 작았다. 누군가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할 때도 ‘싫어요!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못 했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은 내 마음속 말을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꺼내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했고,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싫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디폴트값은, 아무도 밟거나 누르지 않아도 이미 찌그러져 있는 빈 캔처럼 위축되고 쪼그라들어 있었다.
떠올려보면 아빠도 꽤 좋은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그때의 아빠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아빠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이었다. 생계를 위해 6일은 일해야 했지만, 우리들(엄마, 나, 동생)이 교회에 다녀온 일요일엔 늘 전공을 살려 미술 활동을 하셨다. 아빠의 그 큰 팔로도 안을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지름의 통나무를 가져와서 용이 조각된 바둑판을 만드셨다. 그때 아빠는 위험한 공정 중엔 내가 보지 못하게 하셨다. 나의 안전을 걱정하셨다. 처음 아빠의 사랑을 알게 된 시점이다. 나는 아주 작은 것에서도 사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조각할 때는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설명도 해주셨다. 그때의 아빠는 세상을 창조한 신처럼 대단하고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선생님 같기도 했다. 미술 활동을 하는 아빠는 꽤 행복해 보였다. 어떤 날은 내가 방학 때마다 가던 시골 외할머니 집을 그리셨다. 그 그림을 그리고 사인까지 하고는 내게 사인의 의미도 알려주셨다. 그건 일종의 비밀 같은 거였다. ㄱ ㅏ ㅇ을 영어 스펠링처럼 보이게 붙여 사인으로 사용하셨다. 비밀을 공유하면 친해진다는 말처럼 어쩌면 그 일로 아빠랑 꽤 특별한 사이가 된 것도 같아 참 좋았다. 그 그림은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어쩌면 아빠도 일요일 하루가 아니라 6일 동안 취미활동을 하신다면 분명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작품을 볼 때마다 조금씩 아빠를 이해하게 됐다. 하루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6일의 스트레스를 이해하게 됐다. 그 당시 미술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전공을 살릴 수 없이 척박하게 살아야 했던 아빠는, 많은 스트레스와 삶과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빠의 작품은 6일의 스트레스와 맞바꾼 하루의 행복이었다. 그 행복들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온 집안을 둘러 선물할 만큼 그 수가 많아졌다. 그 작품엔 땀과 아빠의 나긋나긋한 다정함과 행복이 함께 전해지니까 그걸 안다면 받는 이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빠가 나를 보고 웃는 건 아니라 해도 아빠가 작품을 만들며 웃으면 나도 좋았다. 아빠가 행복한 게 좋았고 웃는 동안엔 나도 불안한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난 언젠가부터 타인을 위한 무언가를 할 때 가장 성취감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대개는 정서적인 부분이었다. 따뜻한 한마디 위로의 말이나 편지, 그림을 그려서 선물하는 일들이었다. 그들이 미소를 다시 찾거나 자신의 길을 다시 걸어갈 때,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무서운 아빠에게서 다정한 미소를 보는 일은, 곧 나의 불안을 잠재우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의 무의식은 내가 살 방법을 기억한 것이다. 체득된 데이터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에 사력을 다하게 한 것이다. 고통과 상처가 승화해 나도 치유되고 타인을 위한 유일한 일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말해주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를 입은 사람의 내면은, 거친 짐승처럼 외롭고 아프고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되어,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만으로 채워져 있다. 그 상태로는 자신의 상처도 치유할 겨를도 없이 최소한의 생명만을 지키기에 힘쓸 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치유한다느니 승화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상처받은 자들에겐 허용되지 않는 영역인 것이다. 아빠도 6일의 삶에선 상처받은 헐크로 살았지만, 하루의 삶에서는 예술로 승화하는 노력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결코 쉽지 않았구나 한다. 그런 아빠를 보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 함에 명확한 이유가 생겼다.
상처받은 사람이 존재의 이유로 살아가기 위해선 상처를 치료함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20대 후반에 처음 시도한 일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에서 심리상담을 받았다. 임상 심리 쪽 유명한 프랑스 임상심리학자부터 유명한 프로이트, 긍정심리학자인 아들러에 이르기까지 그 책에는 방법론의 차이일 뿐 인과관계가 명확했다. 심리적 원인을 인지하는 시점부터가 심리치료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은 성경이었다. 많은 등장인물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많은 위로와 공감, 그리고 치유를 받았다. 그들의 삶은 고난이 기본값이었지만, 눈은 눈으로 대갚음하는 셈법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사랑에 방향성을 두고 끝없이 인내하며 간구하는 모습이었다. 숭고하고도 명징한 사랑에 입각한 삶은 무엇이든 견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됐다. 이것을 토대로 후에 심리학과 목회학을 전공한 목회자분께 더 깊은 상담을 통해 도움을 얻기도 했다. 상처를 치료하는데엔 생각보다 인물과 시간 그리고 사랑이 절실함을 알게 된다.
두 번째는 나의 유년 시절은 고난의 밤을 겪었지만, 신은 내게 눈물을 선물로 주셨다. 아빠로 인해 눈물이 참 미웠지만 울고 나면 마음속 상처와 감정은 깨끗이 씻겨지곤 했다. 실제로 토호대 의대 아리타 히데오 교수의 연구논문에서 확실히 알게 됐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데, 이때 눈물을 흘리면 함께 배출된다. 울고 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평상시로 돌아간다는 연구결과를 보게 됐다. 고통에만 집중하지 않고 아름다운 곳에 시선이 머물며 고통이 희석되는 경험의 이유를 이제야 알 듯하다. 눈물이 아마 진통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부러 내가 그러려고 안간힘을 쓴 것도 아니었다. 거저 받은 선물이었다. 그러니 아빠가 울지 못하게 함에도 눈물이 나온 이유, 무의식은 알고 있었나 보다.
글을 마치고도 끝까지 고민이 많았다. 글에서 강렬하게 남는 아빠에 대한 인상은 곧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 꺼려졌다. 생전에 계신 아빠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걱정이 됐다. 무엇보다 혹여 나의 필력으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그려내지 못할 영역으로 인한 왜곡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글은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외쳐대는 아우성을 외면하지 못해 결국엔 꺼내지고 펼쳐졌다. 그래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무의식이 아빠에게 복수를 선언했다.’ 엄격히 말하면 나의 의식의 복수는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아빠에게 복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왜냐하면 나는 위에서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인물을 통해 치료를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쓰면서 더 명확한 이유를 알게 됐다. 무의식은 그때의 어린 나에게로 시간 여행을 해서 나를 직면하게 하고, 지금 미성숙한 부모로부터 고통 당하는, 모든 아이를 대신해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자면 애초부터 이 글은 아빠를 향한 복수가 아니었다는 방증인 셈이다.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은 구멍의 크기가 크고 작을 뿐 모두 구멍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애쓰는 동안, 상처에 스러져 가는 아이가 없기를, 누구든 나의 약함이 타인의 강함이 되었으면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저자소개
필명: 인사피어(INSIGHT+INSPIRE)
_통찰로 격려하는 삶이 꿈이다
sns그림 작가, 종이 공예와 예쁜 글씨 쓰는 사람. 피아노 반주 봉사하는 사람. 천상 예술인 이지만 글쓰기 공동체 '쓰고뱉다'를 만나면서 내 안에 끝 모를 진지함과 은근한 다정함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궁금해지고 나를 알게 될수록 점점 시선은 타인에게로 향했다. 나의 얘기로도 타인과 닿을 수 있다는 글쓰기는 이제 숙명과도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존재의 이유가 설명되고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날을 꿈꾸며 오늘도 글을 쓴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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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청소년 때 내적치유를 접하며 상처 입어 아파하는 저를 처음으로 마주했던 시간이 떠오르네요. 눈물은 마음의 약이 맞는 것 같아요. 무의식 저편에 있는 그 무언가를 말할 때 치유의 시작이라던 상담 수업내용 생각도 나고요. 저도 어두웠던 시간 여행을 함께 하고 왔습니다.
인사피어
함께 시간 여행 해 주시고 세빌님의 얘기도 들려 주셔서 감사해요. 언젠가 세빌님의 글을 통해 세빌님을 더 알고 싶기도 해요. 글의 힘을 믿으며 글을 통해 서로에게 힘이되는 쓰.뱉이 참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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