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쾅’이 아니었다. 그렇게 규모가 큰 소리가 아니었다. ‘콩’도 아니었다. 그처럼 앙증맞은 소리가 아니었다. 쿵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묵직한 소리가 그날부터 날마다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날은 임신 8주 차에 들어서는 어느 날이었다. 하혈을 한번 한 뒤, 유산의 위험이 있으니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무조건 누워만 있으라’는 진단을 받은 때였다. 입덧을 시작해서 좀 힘들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기다리던 아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알바도 그만둔 때였다.
그런 때에 아랫집에 사는 사람이 바뀌었다. 우리가 살고 있던 건물은 10평이 채 되지 않는 건물이었고, 지하층까지 총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하에는 할머니 한 분이 거주했고, 2층에는 우리가 살았다. 1층에 살고 있던 여자분이 이사 가면서 빈집이 되었는데, 그 집에 할아버지 한 분이 이사를 오게 된 거였다. 이사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얼굴도 보지 못했다.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몸이 편찮으신 할아버지가 이사 오셨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아들이 계약을 진행하고 아버지를 이사시켰다는데, 왜 아픈 아버지를 혼자 살게 두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정말로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같은 건물에 살게 되었고 수도세를 나눠 내야 하는 이웃이 되었지만, 그들의 사는 모양에 대해 크게 관심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의 아니게 자꾸만 신경 쓸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쿵.
“할아버지가 자꾸 의자 위에 올라가셨다가 떨어지시나 봐. 침대에서 주무시다가 떨어지는 걸지도 모르고.” 내가 아기를 지키기 위해 누워 있는 낮 동안에 이따금 들리는 그 소리가 나는 너무 불편했다. 1층에 사람이 없을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고,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나의 심장은 철렁하고 내려앉아야 했다.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나를 타일렀지만, 나의 상상력은 자꾸만 빌드업되고 있었다.
나의 상상이 실제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쿵 소리가 사라진 것과 함께였다. 때는 5월이었고, 봄이라기보다 초여름 날씨라 할 만큼 무더워진 날이었다. 건너편 골목의 벽 하나를 맞대고 거주하고 있는 이웃이 남편에게 자꾸 항의하기 시작했다. 정화조 청소를 좀 하라고. 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그 말을 듣기 며칠 전에 우리는 이미 업체를 통해 정화조 청소를 끝낸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무어라고 가늠하기 어려운 악취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 몰랐다. 그 냄새가 몸이 썩으면 나는 냄새라는 것을.
경찰차가 오고, 동네 사람들이 웅성댈 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되었다. 1층 할아버지가 운명을 달리한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고독사했다는 것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우리 아랫집이었다. 남편은 당장 가방을 싸기 시작했고, 나는 친정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집을 나서면서 바닥에 앉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아들을 보았다. 어떻게 아픈 아버지를 그토록 방치했는지, 그동안 왜 연락 한번 하지 않았던 건지... 비난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다. 그러나 마른 세수를 해대는 그 얼굴을 보며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친정 가족들은 내 마음을 도닥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임신 중이고 유산기가 있는 중이었는데, 그 사건이 어떤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 굉장히 염려해 주었다. 그때 보살펴주는 가족들 안에서 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그때 일을 돌아보면 마음 한편 자그마한 죄책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의 쿵 소리가 멈췄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적어도 쿵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아들에게 알려주기라도 했다면, 아들은 좀 더 아버지를 자주 들여다 보았을까? 쿵 소리 멈춘 게 이상하니 한번 찾아오라고 연락했다면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이 썩어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까? 수도세를 받기 위해서라도 그 집 문을 한번 두드려 보았다면 어땠을까? 아픈 사람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나는 할아버지의 ‘수도 요금을 그저 내가 다 내는 것’으로 관계 맺기를 포기했었다.
고독사. ‘나 홀로 죽음’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나의 경험처럼 독거노인이나 장애인의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3, 40대 사회부적응자들의 고독사가 늘고 있다고 한다. 비혼주의 증가로 인해 독신 가정이 늘고 있고, 출산율 저하로 인해 외동 자녀가 증가한 것도 고독사의 원인으로 꼽힌다. 거기에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독사는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라고 우리는 가끔 외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혼자임을 받아들였다기보다 외로움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고자 하는 방어적인 발언이 아닐까? ‘은둔형 외톨이’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단절을 주장하며 방안에서 하는 일이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 역시 엄밀히 따지자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가치 있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공유의 시간이 확보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다행히 지자체에서 고독사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고립 가구에 대한 전수조사와 관리뿐만 아니라, 위기가구 신고 주민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기도 한단다.(경남 진주시) 고독사 예방 시행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는 곳도 있다.(대전시) 고독사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이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한다면 슬프고도 끔찍한 일을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보듬기 위해 애쓰는 가족들 사이에서 안온함을 느끼면서도, 홀로 죽음을 맞이했던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떠올릴 때면 입 안 어딘가에서 씁쓸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2층에서 작은 생명이 뱃속에서 꿈틀대는 동안, 1층에서는 고독한 이에게 죽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못내 아쉬운 것은 죽음은 막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떠나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네 가정,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여기저기 멍들어 완전하지 못할지언정, 서로 잡은 손만큼은 온기가 가득해 마음만은 안전하기를 간절히 바래 본다.
[저자소개]
글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을 쓸 때 가장 신나기 때문에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쓰고 뱉다’(글쓰기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7년 연애 후 결혼에 골인한 뒤 20년차 주부로 살고 있으며, 초, 중, 고 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한때 ‘완전한 엄마가 되기’를 소망했지만, 지금은 ‘안전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일 학교에서 4세 이하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황금머릿결’이라는 필명으로 7권의 웹소설 전자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습니다. 모든 일상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즐깁니다.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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