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어느 날 보령의 한 시골로 터전을 옮겼다. 갓 시작된 그해 겨울바람에 웅그리던 나는, 집 앞마당의 붉음이 너무나 신기해 매일 관찰하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동백나무 열 그루였다. 사이좋은 남매마냥 줄 지어 서있는 동백들은 반질반질한 진녹의 잎사귀와 수줍은 붉음으로 똘똘 뭉친 꽃봉오리로 가득했다.
끝날 줄 모르는 추위 속에서 붉음을 품어내는 동백나무가 너무나 기특했다. 세상의 모든 추위를, 모든 약함을 품는 것만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래서 겨우내 오며 가며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모든 것이 꺼지는 듯한 겨울에 마주하는 이 붉음은, 활활 타오르는 불은 아니더라도 가늘고 길게 꺼지지 않는 따듯한 불씨처럼 겨우내 나의 지지자가 되어 주기에.
갑자기 몰려오는 시베리아 한파처럼, 살다 보면 인생의 추위가 들이닥치곤 한다. 첫째 하이를 낳기 전까지가 그랬다. 연애 7년 7개월, 결혼생활 11년. 긴 연애 후 결혼했지만 자녀계획은 현실을 핑계로 뒤로 미뤘다. 한 해 두 해 지나다 보니 나 자신도 하지 않는 임신 걱정을 주변에서 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마쳐야 할 과정이 있어서 결혼 후 3년 간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내기로 했는데 말이다.
결혼한 지 만 3년이 되어갈 즈음 시험관 시술로 자녀를 낳은 친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임신 계획에 대해 묻더니 진심을 담아 걱정의 말을 건넸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걱정 하나가 피어올랐다. 우리 부부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딱히 임신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조금 더 있다가 계획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한번 시작된 걱정은 쉽게 멈추질 않았다. 결국 남자와 상의 후 난임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남자와 나 모두 딱히 문제는 없었지만, 결혼 만 3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시술을 해보기로 했다. 남자가 마쳐야 할 과정이 곧 끝나면 이사를 가야 했기에 집 근처의 병원에서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두 번의 인공수정 시술에 실패하고 시험관 1차 시술에서 임신이 되었다. 하지만 잘 올라야 할 임신수치가 얼마 오르지 않았다. 얼마 후 붉은 피와 함께 첫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 후 모든 걸 멈췄다. 임신은 축복이라던데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하는 나 자신에게 서글퍼졌다. 한 달쯤 지났을 때인가, 때마침 남자가 모든 과정을 마쳐 직업적 이동으로 이곳에 내려왔다. 1년 가까이 눈앞에 펼쳐진 초록을 마주하며 편히 쉬었다. 그리고 다시 찾은 병원에서, 2번의 시도 끝에 다시 임신을 했다. 기뻐할 수 없었다. 이번엔 더 잔인한 추위였다. 나팔관 임신(나팔관에 배아가 착상된 비정상적 임신)이었다.
정기검진 차 아기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집을 나섰는데, 대학병원에 가서 나팔관 한쪽을 절제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두 번째 아이를 떠나보냈다. 퇴원 후 회복을 핑계 삼아 푹 쉬었다. 몇 달 후, 시험관 시술을 다시 시작했다가 이내 멈췄다. 몸을 제대로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먹는 것도 가려서 먹고 운동도 꾸준히 했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4개월 동안 흐트러짐 없이 정직한 시간들을 보냈다. 계속 이어진 인생의 한파에 마음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기로 했다.
때마침 겨울이었다. 추위 속에서 단단해지는 시간을 보낸 후 꽃 피는 봄에 다시 시작된 네 번째 시험관 시술에서 따듯한 아이, 첫째 하이를 만났다. 그래서 동백나무에 마음이 더 가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얼붙는 겨울이 깊어질수록 더 붉어지는 녀석을 볼 때마다, 나도 이렇게 추위 속에서 살아내고 있으니 너도 힘내라고, 단단해지라고 응원을 받는 것만 같았달까.
이솝이야기 <해님과 바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바람은 자신의 세찬 입김 몇 번이면 나그네의 외투를 쉽게 벗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 앞에서, 나그네는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더 여몄다. 되려 해님의 고요한 뜨거움 앞에서, 나그네의 외투는 쉽게 벗겨졌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해님도 바람도 아닌 나그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엔 옷깃을 여미는 단단함을, 뜨거운 햇살엔 겉옷을 휙 벗는 유연함을 가진 나그네가. 인생에 찾아오는 추위 앞에서 동백처럼, 나그네처럼 나도 그랬으면.
[저자 소개]
초록, 하늘, 나무, 들꽃. 자연의 위로가 최고의 피로회복제라 믿는 사람. 퍽퍽한 서울살이에서 유일한 위로였던 한강을 붙들고 살다, 시골로 터전을 옮긴 지 8년 차 시골사람. 느지막이 찾아온 줄줄이 사탕 5살 아들, 4살 남매 쌍둥이, 3살 막내딸과 평온한 시골에서 분투 중인 어설픈 살림의 연연년생 애 넷 엄마. 손글씨와 손그림, 디자인을 소소한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 ‘사랑하고, 사랑받고’라는 인생 주제를 이마에 붙이고, 주어진 오늘을 그저 살아가는 그냥 사람. 소박한 문장 한 줄을 쓸 때 희열을 느끼는, 쓰는 사람.
그대여. 행복은 여기에 있어요.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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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 만약 그때, 지금 알고 있는 걸 미리 알았다면 과연 달라졌을까 싶은 당시의 심정들. 그래도 그때를 착실하게, 감정 하나하나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살아왔기에, 지금이 행복으로 불릴 수 있는 건가 싶어지는 글이에요. 고마워요. 덕분에 동백의 붉음을 다시 돌아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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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티제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도 빨간 동백꽃 같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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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니신나
아... 오늘도 참 좋다 님의 글에 푹 빠졌다가 갑니다! 동백처럼, 나그네처럼 저도 인생의 추위 앞에서 그리 의연하고, 유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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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몇 줄의 글로는 담아낼 수 없는 아픔과 기쁨이 담담히 적혀있네요.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음을, 겨울이 겨울로 끝나지 않음을, 동백이 자신이 품고 있던 붉음을 떨궈주는 봄이 찾아옴을 느낄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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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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