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글을 하나 발행하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필진들의 글이 올라오곤 한다. 필자의 졸고에 감히 깔대기(?)를 대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오늘 풀게 될 소소한 이야기와 맥이 맞닿아있다고 생각해 동의도 구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shout out을 하게되었다.
(https://maily.so/archivenews/posts/2nznq98gzp5)
지난 글에서 ‘역량의 공허함과 자격지심을 열성을 가리워 앞세운 기록인’으로 스스로를 고백하였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처럼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니 어느 덧 이끌던 수레는 태양을 향해 질주하려고만 하고 있었다. 필자는 치기만 남은 파에톤이 되어있었는데 이제껏 이카로스 인줄만 알았고 설령 이카로스였더라도 그 운명은 노정되어 있던 셈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발목을 물려던 검은 개에게도 고마워해야 하는 셈이다. 밀랍으로 된 날개로 날 생각보다 튼튼한 두 다리, 두 발을 땅에 딛고 다시 박찰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으니까 말이다.

‘A아무개는 상급기관으로 이직, B아무개는 착실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C아무개는 주식이 떡상해서 차를 외제차로 바꿨다.’
돌아보면 진작 불안감과도 친해졌어야 했다. 아니 불안감 자체를 있어서는 안되는 병리적인 현상으로만 취급하려 했다. 그 불안감의 정체는 실패에 대한 공포였다. 기록을 다루는 기록연구사가 목록과 처리문서에 휩싸여 되려 기록에서 가장 멀어지듯 실패 또한 과정의 한 지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기록연구사로 임용된 이래 연고지 사수와 그를 만회하려는 이직에 실패했고, 연애에도 번번히 실패했으며, 재테크마저 정말 어처구니 없는 계기로 실패했다. 그 와중에 기관의 기록관리에 대한 무관심과 나아지지 않는 입지까지 더해 정말 퇴로가 없는 패잔병 그 자체였다. 전문가임을 자처했지만 그 어디에도 내세울 이력하나 없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속되게 말하는 일개 ‘면서기’나 다를게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필자의 지극히 객관적인 현위치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깨달은지 얼마되지 않아 당황스러우나 낯 부끄러운 고백하나 하자면 이제껏 필자는 기록이 정말 좋아서 이 일을 한 게 아니었다. 불안감의 가장 손쉬운 도피처가 바로 ‘기록과 역사에 대한 숭고한 소명의식’이었을 뿐이었다. 생활에서의 결핍감을 열정으로, 역량이라는 허장성세로 치장함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 숭고한 소명의식이 자격지심과 위험한 화학적 결합을 하며 점점 기록 일의 가치를 나의 가치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기록 일이 사회에서,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 당할 때마다 이를 시류의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 자체에 대한 공격과 부정으로 받아들였다. 시류(時流)는 말 그대로 물결이며 이는 자연법칙인지라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다. 거스르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온몸에 힘이 빠져 종국에는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고야 만다. 그리고 그 원리대로 그 공격과 부정은 실제로 나를 향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학대하는 빌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공격하지도 않는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가 되고야 만 것이다.
물이 입으로 쇄도할수록 더욱 더 발버둥을 치게되었고 급기야는 구조하러 오지 않는 주변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원망의 다른 이름은 ‘오만과 독선’이다. 기록 일을 단지 직업으로만 바라보며 무관심을 훈장삼는 이들을 보며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어찌 저리도 무심할까.’ 혀를 찼다. 물은 제 발로 들어가 스스로 삼켜놓고 빠져나오거나 안 삼킬 궁리를 하긴 커녕 남도 같이 물을 먹어야 한다고 강요하며 멋대로 물에 들어오지 않은 이들을 재단했다. 이쯤되면 가히 삼도천에 빠진 이카로스가 물귀신이 되어가는 서사에 가깝다.(절대 세이렌이 아니다. 필자에겐 그런 매혹적인 재능은 부족하다.)
순리대로 물은 어느새 입을 넘어 코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힘이 다 빠져버린 끝에야, 아니 정확히는 힘을 다 빼버린 뒤에야 몸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또 나만 진심이었지’의 본질은 사실 물에 들어오지 않은 이들의 무심함이 아닌 흐름을 이해하지 않고 무작정 뛰어든 스스로의 탓이었음을.
모든 기록인들이 태양을 집어삼킬 듯 향하려는 소명의식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각자의 생애에는 수많은, 그러나 각기 다른 양상의 부침이 있다. 이를 감안하고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을 지며 시류를 타지 않더라도 끝내 가라앉지는 않는 부표와 같은 자세 역시 훌륭한 소명의식이다. 외려 알량한 숭고함을 놓고 일과 자신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둠으로써 더 획기적이고 신선한 창발이 나올 수도 있다. 때로는 물 밖으로 나와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고 점검하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난 편에서도 밝혔듯 한계의 6~7할만 투여하기로 한 지금의 태도는 냉소가 아니다. 도리어 회복불능한 냉소에 빠지지 않기 위한 영악한 술책의 하나이기도 하다. 일에 휩싸여 망가지면 이름은 남겠지만 이 삶이 기록인 A로만 남을 건 아니지 않겠는가. 기록인 A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으로써, 신뢰하는 친구로써 또는 먼 발치에서 응원하는 이들의 한 인간으로써의 삶도 있다.
물론 한동안 상당량의 물을 들이켰기에 하루아침에 기능이 정상화되지는 않을테다. 검은 개가 무서워 물에 들어가기보다 검은 개의 존재를 인정하며 물리기 전에 거리를 두며 숨을 고를 시간을 벌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힘을 빼고 과잉된 의식을 가라앉히고 나자, 이전에는 잡힐듯 보이지 않던 것들의 윤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연무가 걷히고 나니 현장과 현실이 이전보다 더 차분하게 읽히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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