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채집: 간판도시》
간판 노동이라는 큰 틀을 들여다보겠다며 시작한 기획은 한 사람의 작업장에 새겨진 여러 흔적을 살펴보는 전시로 귀결되었다. 일 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작가들은 도시, 노동과 관련된 여러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기획의 의도라는 도착점에 가장 가까운 백지은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시 초기 기획 단계에서 아이디어를 보태고, '아카이브', '아카이브 아트' 개념을 함께 고민했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고, 준비 과정에서 백지은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기록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도 꼭 소개하고 싶었어요. - 설리반


《도시채집: 간판도시》
주최 (사)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기획 맹기돈·이혜린·정우주
2026. 9. 17 – 9. 29 (월요일·9.24~25 휴관), 13:00–19:00
탈영역우정국 1F(서울 마포구 독막로20길 42)
참여작가 김푸르나·박지은·백지은·양지석·오재형·조은성 | 작가와의 대화 9. 19(금) 18:00
후원 공공상생연대·한국예술인복지재단 | 협력 유진기업·탈영역우정국
《도시채집: 간판도시》는 간판을 모으는 전시가 아니다. 기획의 초점은 '노동'에서 '1인 노동 공간'으로, 다시 '간판 노동'으로 점점 좁혀졌다. 전시가 담으려 한 것은 손으로 그리던 빌보드에서 디지털 출력으로 넘어온 기술의 전환을 거쳐 온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간판을 만드는 사람들을 통해 도시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보고자 한 것이다.
이 전시가 채집하는 것은 간판을 만드는 노동과 그 현장이다. 간판은 도시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가장 빨리 교체되는 사물 중 하나다. 가게 업종이 바뀌면 떼어지고, 건물이 헐리면 함께 사라지며, 철거된 뒤에는 대개 고철로 처리된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도, 버려졌는지도 남지 않는다. 도시의 표면을 구성하면서도 그것을 만든 노동은 어디에도 적히거나 기록되지 않았다. 전시는 이런 무관심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이 전시가 택한 방법은 수집과 복원이 아니라 사변적 아카이브(Speculative Archives)다. '사변적'이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사유와 추론을 통해 인식한다는 개념으로, 학술적으로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감각, 무게, 소음, 반복되는 동작의 리듬이라는 공백을 작가적 상상으로 채워 사회적 기억으로 되돌리려는 의도를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백지은
극작을 전공해서 오래 글을 쓰다가, 지금은 여러 매체로 옮겨서 작업하고 있다. 사진하고 영상하고 글을 엮어 무엇인가를 만드는 작업을 주로 한다. 전시 《도시채집: 간판도시》에서는 40년 동안 간판을 만들어온 한 사람을 화면 전면에 세우고, 그가 제작해 온 상호명들은 디지털 기호가 되어 그 뒤를 흘러가도록 했다. 만든 이의 몸과 만들어진 것의 행방이 한 화면에서 처음으로 마주 놓인 것이다.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작업 결과물
작업의 출발점은 간판집 사장님의 외장하드였다. 그 안에는 그동안 작업한 간판 시안 파일 1만 5천여 개가 남아 있었다. 백지은 작가는 처음에 이 파일들을 하나하나 구글맵과 대조해 가며 실제 간판을 찾아 나갔다. 그러다 자주 가던 빈대떡집의 간판을 발견했다. 안산의 학교 앞 건물, 즐겨 가던 카페의 간판도 그 안에서 찾았다. 사장님의 간판을 찾는 일과 작가 개인의 기억이 겹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작업이든 아카이빙은 처음엔 방대한 자료를 일단 다 보려는 데서 시작해요. 시간상 다 살펴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시도 덕분에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구조가 잡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현실적으로 안 되는 부분이 분명해지면 그때 방향을 트는 거고요. 간판과 구글맵을 매칭하는 작업도 처음에는 일일이 하다가, AI한테 맡겼어요. 만약 처음부터 AI를 활용했으면 '간판 상호를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하는 생각이나 고민, 호기심을 갖지 못했을 것 같아요. - 백지은

백지은 작가의 오랜 글쓰기 경험은 지금의 작업 방식에도 남아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쓸 때 인물이나 즉흥성보다 결말 장면을 먼저 정해두고 그리로 달려가는 플롯을 우선한다고 말했다. 작업의 결말을 먼저 정해두고, 그 장면으로 이르는 경로를 찾는 습관이다. 방대한 자료 앞에서 일단 전부를 훑어보려는 것도 이 태도에서 나온다. 다만, 그 도착점은 처음부터 선명한 답이라기보다, 방향성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면에서 자료 전체를 훑는 일은 그 흐릿한 윤곽을 조금씩 또렷하게 만들고, 거기에 이르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예전에는 기록을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충실하게 보여 주는 게 윤리적인 아카이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오히려 허구가 진짜보다 진실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글을 쓸 때도 내용은 허구지만, 인간의 한 단면이나 진실을 보여줄 수 있잖아요. 제 기억에서 그 장면은 진실이거든요. 그래서 '비어 있는 걸 어떻게 기록하지'라는 질문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거기엔 어김없이 상상이나 해석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 개입에는 오류도 있고 오독도 있겠지만요. - 백지은
작업을 이어가면서 작가는 지도 위에 간판의 위치를 표시해 도시의 장소성을 드러내려던 초기 구상을 포기했다. 대도시들의 풍경은 서로 너무 닮아 지도 형식으로 담기에는 시각적 한계가 뚜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신 작가는 각기 다른 간판 디자인 자체를 작업의 토대로 삼았다.
몸에 쌓인 노동과 해파리처럼 떠오르는 이름들
전시에 참여한 여섯 작가는 작업장에 쌓인 먼지, 부자재, 버려진 간판들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공간을 채운 여러 소리에 주목하기도 했다. 다른 작가들이 도구와 소리, 간판이라는 결과물과 그 과정에서 생산된 여러 파편에 집중했다면, 백지은 작가의 관심은 억압과 관계였다. 그런 점에서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사변적 아카이브가 숨겨진 것을 끄집어내는 일, 일종의 해방의 성질을 지녔다는 점에 끌렸다고 말했다.
작업 계획도 그렇고, 사람이나 생태 이런 쪽에도 관심이 있으신 거였네요. 다른 분들은 물리적인 도구나 소리, 결과물 쪽이었다면 백지은 작가님은 좀 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 이대로

노동을 어떻게 형상화할지를 고민하던 작가가 주목한 것은 사장님이 디지털 기계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사이보그" 같은 모습이었다. 전시된 작업은 사장님의 노동을 마치 공연처럼 다루고 있다. '공연적 노동'이라 설명한 작가는 분절된 노동 과정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잇기 위해 연속 촬영한 사진을 이어 붙이고, 사장님이 만든 상호명들은 "심해의 해파리"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도록 연출했다.

사변적 아카이브라는 개념에 끌렸던 이유는, 제가 화두로 삼는 게 '억압'이기 때문이에요. 억압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 끈은 예전부터 이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작품이 되든, 그렇지 않든 그 안에는 그런 감정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변적 아카이브가 어떤 점에서는 해방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내는 거요. 그래서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 백지은



이대로가 노동을 가시화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백지은 작가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 방법을 찾는 게 재미이기도 했고, 저한테는 숙제였던 것 같아요. 어떻게 이걸 찾아내지? 일단, 중심은 몸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변적 아카이브에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의 몸이에요. 몸에는 그 사람이 해 온 노동이 축적되어 있으니까요. 그럼 그 몸을 어떻게 보여 주지?
사장님이 작업하고 있는 공간에는 공연 같은 성격이 있다고 느꼈어요. 공연은 사라지고, 기록되지 않잖아요. 그 순간이 일종의 퍼포먼스니까, 전면적으로 연극처럼 보여 주고 싶었어요. 사장님은 그냥 일하시는 게 아니라 나름의 방식이나 노하우가 있으시잖아요. 암묵지라고 해야 할까요. 본인 머릿속에만 있는 노동의 규칙이나 요령 같은 것들을 찾아내서 기록하려고도 해 봤는데, 그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 백지은

작품의 두 번째 파트는 도시와 간판 사진이 콜라주된 화면이다.
전시가 끝나갈 무렵, 도착한 자리에서의 회고
대화를 마무리하며, 앞으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의 기준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간판을 만드는 사장님조차 쓰레기로 여겼던 일상적 재료들이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과 그 가치 판단을 둘러싼 이야기였다.
전시가 열리고, 백지은 작가는 간판집 사장님과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사변적 아카이브가 쓰인 전시 서문을 먼저 읽으시고, 작품들을 보셨어요. 작가들이 재료로 쓴 것들을 모은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신 것 같아요. 선풍기 먼지를 그대로 탁본처럼 만들거나, 쓰고 남은 재료들, 본인에게는 쓰레기였거든요. 쓰레기인데 작품에 쓰였고,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거에 신기해하셨어요. - 백지은
이대로는 아키비스트가 작가의 창작 영역에 얼마나 개입해야 하는지, 그 선을 두고 겪은 어려움을 이렇게 돌아봤다.
어느 정도는 작가의 창작 영역인데 거기에 너무 개입을 해야 되나, 아예 안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떨 때는 너무 제 생각을 더 얘기해서 감정이 상할 때도 있었던 것 같고, 예전에 그런 지점들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그런 과정이 그냥 필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서로 선을 넘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 이대로
저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작가는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는 부분에서는 많이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의 창작 영역은 존중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기획은 '아카이브 아트'에서 출발했지만, 정작 그 말을 전시 제목에 쓰지 않았어요. 전시에 관해 얘기를 나눌수록 기록되지 않은 '무엇'을 예술적으로 가시화해보고자 했던 전시가 된 것이고, 결과물을 광범위하게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기획자와 논의해서 암묵지의 개념을 '사변적' 아카이브라는 말로 가져오자고 했어요. 우리는 간판만 보지만, 그 간판을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이나 환경, 몸의 움직임 같은 건 기록하지 않잖아요. 그런 걸 대체할 수 있는 말로, 조금 생소한 단어를 통해 전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하고자 했어요. '사변적'이라는 말이 흔히 쓰는 단어는 아니라서 일부러 찾아보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어요. - 설리반
기획은 '간판 노동'이라는 큰 틀에서 시작했지만, 전시는 시대를 관통하며 변화해 온 산업의 역사와 굴곡을 전달하지는 못했다. 넓고 추상적인 질문에서 시작된 전시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이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전시는 간판 노동이라는 추상에서 한 사람의 작업장이라는 구체로 좁혀졌고, 그 작업장에서 다시 도시의 빛과 기호라는 추상으로 옮겨 갔으며, 그 추상은 화면 위에서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한 사람의 노동에는 그 사람만의 시간이 아니라 이 업종이 변화해 온 전환이 함께 쌓여 있다. 구체적인 한 사람이 어쩌면 추상적인 전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각각 미술과 도시를 전공하고, 그 관심을 기록으로 확대한 두 필자가 백지은 작가의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아키비스트의 관점으로 '아카이브 아트', '도시기록'을 주제로 종종 이야기를 나누고 글로 옮긴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기를 허락하고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백지은 작가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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