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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다이어리의 계절에 부쳐

2026.11.04 | 조회 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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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
Unsplash의 Evelyn Verdín
Unsplash의 Evelyn Verdín

 

기록 '취향'

 

다이어리의 계절입니다. 2026년도 두 장이 채 남지 않은 11월 초, 아마 교보문고나 모닝글로리 등 우리 주변 문구점에는 이미 2027년(숫자가 너무 어색합니다. 2027년이라는 연도가 존재한다니?) 다이어리가 매장 입구 가판대를 장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근 1년 사이 다이어리 꾸미기("다꾸")가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는 매출액 증가로도 이어졌습니다.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다이어리와 필기구 등 '아날로그' 아이템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1]​.

29CM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48% 이상 증가했다. 이 가운데 다이어리·플래너 거래액은 63% 이상 늘었고, (...) '텍스트힙'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책갈피와 북커버 등 북 액세서리 거래액도 30% 증가했다[2]​.

 

다이어리 매출액 증가는 '텍스트힙', '아날로그로 돌아가기(고잉 아날로그)'[3]​ 트렌드와 연결된다고 보도됩니다. '텍스트힙' 트렌드는 독서와 기록을 세련된 취향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입니다[4]​. '나만의 다이어리'와 같은 개인의 '기록 행위' 자체를 취향으로 좇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의미이며, 텍스트힙과 연관된 기록 트렌드는 주로 아날로그 매체인 종이 다이어리에 펜 글씨를 쓰는 형태로 나타나곤 합니다.

 

'아날로그로 돌아가기' 트렌드는 텍스트힙과 매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해당 트렌드를 다룬 한 기사에서는 디지털 기술로 가득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찾는 곳이 아날로그 감성으로 점철된 공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웹 디자이너로 일하는 김OO(33) 씨의 하루는 온갖 첨단 기술과 함께 시작된다. (...) 그렇게 도착한 카페는 아날로그 감성을 전면에 내세운 공간이다. 스피커에서는 LP 음악이 흘러나오고, 테이블에는 종이책과 손글씨를 쓴 노트가 놓여 있다. 예약한 자리를 찾아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읽던 페이지 귀퉁이를 펼치고, 마음에 남는 문장은 노트에 옮겨 적는다[5]​.

 

기록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사람들이 아날로그 공간을 즐긴 뒤 그 경험을 디지털 공간에 기록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2주에 한 번쯤 이곳을 참는다는 김씨는 (...) 돌아가기 전에는 읽은 책과 공간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날의 여유를 기록하는 공간은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다[5].

 

경험의 기록과 연결되는 또 다른 트렌드로, 최근 2030의 새로운 취미로 떠오르는 디지털 카메라 사진 촬영과 탐조(探鳥)가 있습니다.

 

일본 카메라영상기기공업회(CIPA)가 지난 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디지털카메라 출하량은 943만 8876대로 전년 대비 11.2% 증가했다. (...) 젊은 층 사이에서도 카메라에 대한 관심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니콘이미징코리아가 지난 17일 개최한 사진 출사 프로그램에는 총 164명이 신청했다. (...) 신청자 10명 중 8명이 30대 이하였던 셈이다[6]​.

탐조가 최근 젊은 세대에서 새로운 취미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새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새의 이름을 알아가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며 자신만의 콘텐츠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한다[7]​.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사진을 빠르게 남길 수 있는 시대지만 일부러 디지털 카메라를 장만하여 세상의 다양한 장면을 직접 보고, 촬영하며 걷는 과정을 누립니다. 원한다면 어느 때든 새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지만 새를 찾아 배회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고, 이를 소셜 미디어에 공유합니다.

 

'기록' 취향

 

이 모든 트렌드는 '직접 하는 경험'과 그 경험의 '기록'이라는 공통점으로 귀결됩니다. 현대인은 디지털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 0과 1의 세계에서 벗어나 내가 손으로 직접 작성하고 만드는 경험을 추구합니다. 동시에 그 경험을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특정한 공간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다만 초점이 '아날로그'와 '경험'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기록이 위치하는 곳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이어리를 꾸미고 문장을 필사하는 활동은 '쓰는 행위'가 곧 경험이자 목적입니다. 반면 아날로그 공간 방문, 디지털 카메라 사진 촬영을 위한 일련의 과정, 그리고 탐조라는 경험 후 디지털 환경에 남겨지는 기록은 경험에 따라붙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경험이 기록으로 남겨지기 전, 사람들은 손으로 직접 수행하고 피부에 닿는 감각을 통해 느낌과 욕구를 충족합니다. 그렇게 충족된 느낌과 욕구에 대한 감상, 그리고 기억이 기록으로 남겨집니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직접 내 손으로 적고 만들어 보는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분석[1]

"카메라를 들고 나가 사진을 찍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6]

차이는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스티커 하나를 붙였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떼는 시간, (...) 인간에게는 그 비효율 자체가 경험이다. AI는 몇 초 만에 완성도 높은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스티커를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며 보낸 30분까지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3].

 

한편 다이어리가 과거 효율성의 도구에서 "감정을 기록하고 기억을 붙잡아 두는 사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며, 다이어리가 하나의 정체성 전시관이자 기억 지도가 된 현재를 논하는 기사도 있습니다[3]. 해당 기사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소비행동학자 러셀 벨크의 '확장된 자아(extended self)' 개념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물건이 때로는 나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라는 취지에서요.

 

다이어리와 경험의 기록에 기록학의 렌즈를 가져다 대면 '개인 기록'이 보입니다. 개인은 스스로 중요하게 여긴 경험을 선별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이것을 다이어리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축적합니다. 개인은 이렇게 소유하는 것들을 나의 '확장된 자아'라고 여깁니다. '정체성 전시관'이자 '기억 지도', 우리는 이것에 붙일 만한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기억과 정체성을 결집시키면서 기록이 쌓여 있는 곳, 이것은 (느슨한 개념의) 아카이브가 아니던가요.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을 좇으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온 필자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데리고 자기도 모르게 아카이브를 만들게 하고 있었다니, 이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뭐 하는 녀석이지? 기록은 (도대체) 개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록의 심리학

 

다이어리나 사진 등 개인이 기록을 생산하는 것은 그 경험에 대한 '몰입(engagement)'의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188명의 사람을 버스 투어에 참여시켜, 그중 95명은 사진을 촬영하게 하고 93명은 사진을 촬영하지 않게 한 심리학 실험에서 사진 촬영군은 비촬영군보다 버스 투어 경험을 더 즐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8]​. 촬영을 위해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그만큼 경험에 더 몰입하게 되며 이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입니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세 차례 글을 쓰게 한 국내 연구에서는 실험 이후 참여 대학생들의 긍정적 정서와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9]​. 즉, 어떠한 장면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거나, 본인 경험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그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개인이 기록을 생산하는 활동 자체가 개인을 즐겁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이 가져오는 심리적 효과는 생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노스탤지어(Nostalgia, 향수)라는 정서가 있지요. '과거에 대한 감상적 동경'을 의미하는 노스탤지어는[10]​ 과거를 회상(recall)하면서 불러일으켜집니다. Routledge et al.(2012)[10]에서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향수 어린 기억 회상, 바라는 미래 상상, 근래의 좋았던 일 이야기, 이 세 가지를 비교하는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실험 결과, 노스탤지어가 삶의 의미감을 증진시키고, 의미를 더 찾아 헤매려는 '의미 탐색' 동기를 감소하게 하며, 의미가 흔들리는 '의미 위협'에 대한 방어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 향수 어린 경험을 회상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고, 의미에 대한 위협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노스탤지어를 일으키는 데는 과거의 경험을 일깨워 주는 심리적 매개체가 필요하며, 개인의 기록이 그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평범한 일상을 타임캡슐에 기록해 두었다가 시간이 지난 뒤 열어 본 사람들은, 타임캡슐이 과거의 추억을 불러오면서 보관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그 일상에 더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11]​. 현재의 기록 취향 트렌드로 생산되는 개인 기록이 많을 것입니다. 생산된 기록이 잘 축적되어 이후 각 개인에게 다시 발견된다면, 기록은 생산 단계에서 삶을 즐겁게 만들고, 활용 단계에서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만난 기록

 

현재의 트렌드 읽기로 되돌아가 봅니다. 뭔가 허전함이 느껴집니다. 다이어리를 꾸미고, 문장을 옮겨 적고, 카메라를 들고 걷고, 새를 촬영하여 공유하고……. 그렇게 남겨진 개인의 기록, 과연 5년 뒤에 다시 펼쳐질 수 있을까요. 현재의 '기록' 취향은, 실은 생산되는 순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생산 순간에 즐거움을 맛보고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타임캡슐 연구가 보여 주듯, 인간은 기록을 다시 열어 볼 때의 가치를 낮게 짐작하니까요[11].

 

앞서 개인의 다이어리와 소셜 미디어 계정을 '느슨한 개념'의 아카이브라고 언급한 것은, 이들이 기록학계에서 지칭하는 아카이브와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경험 수집함 정도 되겠지요. 다만 개인이 스스로 무엇을 남길지 즐겁게 선별하고 그것을 축적해 두는 과정이 이미 익숙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이 사실만으로도 차후 기록이 다시 발견되어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할 여지를 남겨 둡니다.

 

다이어리의 계절입니다. (이제 와서 이야기하지만, 저는 다이어리를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달 정도 열심히 쓰다 설날즈음 하여 방치될진 모르겠으나 아무튼 기웃거리게 되는 2027년의 다이어리를 고르기 전, 올 한 해를 함께한 2026년의 다이어리 앞장을 펼쳐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올해 1월에 촬영했던 사진을 갤러리에서 확인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기록은 생산되는 순간 한 번, 재발견되는 순간에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감정적 선물을 건넵니다. 그 녀석, 제법 좋은 녀석입니다.

 

각주

  1. [1] 이소정. (2026.10.05.). ‘다꾸’-손글씨-뜨개질… AI 시대에 2030 ‘손맛’ 소비 급증.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261004/134784181/2
  2. [2] 박윤희. (2026.09.03.). 다이어리 꾸미고 스탬프 찍고... '어른이들' 놀이터 된 문구 팝업 [트렌드]. 세계일보, https://www.segye.com/newsView/20260902517013
  3. [3] 손현주. (2026.10.23.). AI 시대에 '일상을 꾸미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cience/future/1283797.html
  4. [4] 김희선. (2026.09.20.). "집·차는 못 사도 이건 산다"…'뜻밖의 소비'에 빠진 2030 [김기자의 알고리즘].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09183185H
  5. [5] 박상준. (2026.10.30.). AI 시대에도 LP 듣고 필름카메라 든다... 뉴트로를 선택한 젊은층 [Now 2.30]. 데일리안, https://www.dailian.co.kr/news/view/1707771/AI-%EC%8B%9C%EB%8C%80%EC%97%90%EB%8F%84-LP-%EB%93%A3%EA%B3%A0-%ED%95%84%EB%A6%84%EC%B9%B4%EB%A9%94%EB%9D%BC-2026
  6. [6] 황수영. (2026.10.19.). "폰카로는 이 재미 못 느껴요"... 카메라 들고 거리 누비는 2030 [트렌디깅].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61019/134865071/2
  7. [7] 김지윤. (2026.09.04). 2030 새 취미, 느긋한데 짜릿해... '힐링과 도파민 사이' 오래 기다려 발견하는 재미, 탐조.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article/202609040700005/?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8. [8] Diehl, K., Zauberman, G., Barasch, A. (2016). How taking photos increases enjoyment of experience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11(2), 119-140.
  9. [9] 최가영. (2015). 대학생 집단의 대인관계 성장 글쓰기가 용서 및 주관적 안녕감에 미치는 영향, 인지행동치료, 15(1), 57-75
  10. [10] Routledge, C., Wildschut, T., Sedikides, C., Juhl, J., Arndt, J. (2012). The power of the past: Nostalgia as a meaning-making resource. Memory, 20(5), 452-460.
  11. [11] Zhang, T., Kim, T., Brooks, A. W., Gino, F., Norton, M. I. (2014). A “present” for the future: The unexpected value of rediscovery. Psychological science, 25(10), 1851-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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