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믿을 수 있는 사람> (곽은미, 2023)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막 딴 한영(이설)은 북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민입니다. 자격증 면접관이 이 일을 왜 하고 싶냐는 질문에 먼저는 우리나라를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이 자랑스럽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다고 답했던 그녀는 선배 가이드를 녹음하면서 따라다닐 정도로 의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의지는 꺾이고 한국 정착의 꿈은 더 멀게 보입니다.
노력이 열매맺지 않는 구조
한영의 집에는 한국사를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납니다. 영화에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그녀는 꽤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고, 또 값을 치를 일도 많았겠지요. 남한 입국 전 중국에서 머무는 동안 중국어를 가르쳐주던 리샤오(박세현)와의 과거는 남한 입국에 대한 희망과 노력이 있었는지 얼핏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겹게 획득한 관광통역안내 자격증이지만 마음처럼 돈을 벌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관광객이 여행사와 제휴 맺은 업체에서 구매한 액수가 급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한영은 그리 반죽 좋은 성격은 아니었죠.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알아봐 주는 고객들에게 선물을 받기도 했지만, 간혹 등장하는 무례한 관광객에게 적절한 대처 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결국 사드 배치로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면서 그녀는 마지막 가이드를 배정받게 되고 한영은 마지막 가이드에서 쇼핑을 강권하고 관광객들의 구미에 맞게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설명을 부연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일보 후퇴는 낭떠러지?!
한영이 무리수를 둔 이유는 그녀가 그만큼 절박한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싼 수수료를 치르면서 북에 계신 어머니께 송금 해야하고, 함께 탈북한 동생은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두절되어 수소문하는 중이지요. 그 와중에 중국에 있을 때 친했던 리샤오는 관광비자로 들어와 남한에서 취업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니 한영이 짊어진 부담감에 무게가 더해집니다. 결국 한영의 무리수는 선배 가이드에 의해 고발되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보지만,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뚫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한 온 지 3년이나 됐고, 경력도 이렇게 있는데 뭘 얼마나 더 적응해야 합니까?”
재취업은 계속 미뤄지고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거기서도 듣는 건 “탈북민을 뭘 믿고 가불을 해줘”라는 말입니다. 이 나라는 한영이 몇 년을 더 살면 그녀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줄까요? 어쩌면 정착할 수 있다고 여겼던 한영이 어리석었던 것일까요?
마음을 열었던 사람
퍽퍽한 남한살이에서도 한영에게 웃음을 허락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는데요. 먼저는 같은 탈북출신 친구 정화(오경화)입니다. 현실적이고 판단이 빠른 정화는 한영의 상황마다 적절한 용기와 위로, 조언을 해주지요. 정화는 파트너와 이민을 떠나게 되고, 그런 그녀에게 한영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경복궁 투어를 시켜주며 추억을 선물합니다.
다른 한 명은 한영을 담당했던 신변 보호 감찰관입니다. 탈북민들 사이에서는 ‘감시자’로 이야기되지만, 한영의 담당자는 필요한 순간마다 찾아갔고, 꼬치꼬치 캐묻거나 괜한 엄포를 놓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영은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감시자’에서 실명으로 변경하지요.
한영이 마음을 열고 의지할 수 있었던 이 둘의 존재는 한영이 쉬이 지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민과 부서 이동으로 이들과의 접점조차 끊어진다는 현실은 막다른 골목에서 잠깐 앉아 쉴 의자 하나 없는 길목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아닌가 싶지요.
마지막에 한영은 짐을 쌉니다. 집도 깨끗이 정리하고요.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들어가는 한영의 얼굴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동생이 남긴 종이에 적혀 있는 데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의 미성숙함과 편견을 뒤로 한 채 말이죠.
그러나 혹시 “이제는 너 자신을 위해 살아.”라는 정화가 남겼던 말을 새겨들은 거라면, 보호 감찰관이 “한영씨, 꿈은 뭐에요?”라는 질문에 여행하는 거라고 답했던 자신을 기억했던 거라면, 한영의 뒷모습은 정착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여행자로 상태로 떠난 것은 아닐지 긍정적인 추측을 해봅니다.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두드러지는 극적 요소나 요동치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 첫인상이 심심할 수는 있지만 일상적으로 부딪힐만한 어려움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탈북민에 대한 전형을 빗겨 갑니다. 한영을 극적인 상황으로 내몰기 위한 억지스러운 설정이 없는 것이죠. 또한 조연캐릭터 역시 무조건 악역이 아닌, 원칙주의 성향의 사람, 잇속에 따라 처세술이 능한 사람 등 납득가는 캐릭터로 그려진다는 점 역시 훌륭한 지점입니다.
곽은미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한영에게서 보이는 이방인의 모습은 남한의 보통 20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근로자에게 월급이 배정되는 방식의 문제나 직업 내 윤리적인 문제와 같은 보편적인 어려움은 국내 청년이라면 누구나 고민할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방인으로서의 감정과 상황, 환경에 놓일 수 있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었지요. 이방인이 긴장을 풀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방법은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내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기면 불안이 덜어지고 조금씩 편안한 상황이 연출되겠지요. 그런 면에서 이방인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존재는 참으로 고맙고 기다렸던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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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일아, 강원중
편집디자인 : 강원중
2023.11.0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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