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주간모기영 167호

[최은의 취미와 취향] 소라 네오의 <해피엔드>(2024)

2025.07.05 | 조회 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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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의 취미와 취향]

소라 네오의 <해피엔드>(2024)

 

어쩌다보니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이야기를 연달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모기영 시사회로 미리 만난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가 현재의 대한민국과 미래를 생각하게 했다면, 소라 네오 감독의 <해피엔드>는 지나간 시절의 친구들과 떠나온 공동체와 지금은 각자의 길로 흩어진 사람들, 그러니까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해피엔드>는 나름 SF이고 가까운 미래 일본을 시공간으로 선택했음에도 그렇습니다.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고등학교 졸업반인 코우와 유타, 아타와 밍, 그리고 톰은 음악연구동아리의 친구들입니다(저런, 연구라고요?!). 다섯 청소년이 나이트클럽에 들어가고 싶어서 입구에서 통사정을 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요, 이들 중 유타와 코우가 클럽 잠입에 성공하지만 곧 단속에 걸리고 도망쳐서 모두 함께 학교 동아리방으로 숨어드는 것이 첫 에피소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아이들이 대체로 주변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죠.

코우는 4대째 일본에 거주하고 있으며 체류허가증 상시휴대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자이니치(재일한국인)이고, 유타는 모친이 수시로 집을 비우는 한 부모 가정의 외아들입니다. 흑인 혼혈인 톰은 아버지를 찾아 졸업 후엔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고요, 대만인 혼혈의 밍은 중국어를 잘 못하는 중국계입니다. 장난기가 많으며 패션 감각이 남달라 치마교복을 고집하는 남학생 아타도 예사로운 캐릭터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요.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동아리방에서 함께 밤을 보내고 헤어지면서 유타는 코우에게 “사랑해!”라고 낯간지러운 인사를 던지는데요, 유치원시절부터 친구인 유타와 코우는 다섯 중 가장 친밀하고 가장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 단짝친구입니다. 테크노음악과 디제잉에 대한 열정도 둘은 남달랐어요. 언제까지나 함께 꿈꾸고 즐거울 수 있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코우의 ‘계몽(?)’ 또는 각성, 그도 아니면 막 눈에 들어온 사랑 때문에, 그러니까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둘 사이를 벌어지게 하고 코우가 유타를 철없고 한심하게 보도록 만드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균열을 맞게 됩니다.

일단은, 같은 반 여학생 후미 때문이라고 해두겠습니다. 또래에 비해 성숙해 보이는 후미는 반정부 시위를 비롯해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학생이었고요, 학내의 불합리한 이슈에도 침묵하지 않는 행동파입니다. 최대한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 졸업해야 대학에 갈 장학금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이방인 코우의 형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용기를 지닌 친구였죠. 후미와 함께 시위에 참여하고 학교 밖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늘어가면서 코우는 유타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느냐며 비난하기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우리가 대학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해피엔드>에서 근미래 일본은 공포를 팔아 시민들을 통제하는 파시즘 정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곧 대지진이 올 거라며 중앙정부의 통제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총리는 수시로 엄포를 놓고요, 학교 간 경쟁을 뚫고 내진시설 보조금을 받으려면 정부 관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핑계로 교장은 권력에 빌붙기를 일삼았어요. 자신의 차를 망가지게 한 아이들의 장난(엄격하게 말하면 그건 지진 때문이었지만요)에 뿔이 난 교장은 급기야 학교 전체에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해서 스캐닝을 통해 학생들에게 벌점을 매기기까지 합니다. 수업에 자위대가 들어와 군을 선전하면서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 학생들은 배제하는 차별을 당연시 하고요. 후미는 이 학생들과 함께 교장실을 점거하는 농성으로 학교의 억압적 정책에 항거합니다. 이 와중에 쿠미와 유타 사이엔 뛰어넘을 수 없는 협곡이 자라고 있는 것도 같지요.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해피엔드>는 소라 네오 감독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입니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2023)로 먼저 이름을 알린 소라 네오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이죠. 도쿄와 뉴욕에서 살았던 그는 동일본대지진 후의 반원전 시위와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와 같은 인권운동, 2016년의 미국 선주민들의 다코타 파이프 반대 시위 등을 통해 자본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눈을 뜨게 됩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 등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친밀했던 학창시절의 친구들과 점점 멀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요컨대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자전적인 이야기로서, 개인적인 서사로 성큼 다가오는 측면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저런 이유로 ‘아, 저 친구와 나는 길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멀어진 친구들을 떠올리는 것이 그러므로 이상한 일만은 아닐 겁니다.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해피엔드>(소라 네오, 2024) [이미지출처: KMDB]

나고 자란 배경을 부정해야 할 만큼 인식의 전환이나 각성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나 계기들이 혹시 여러분에게도 있으신가요?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수교단을 떠나야 했던 경험이라든지, 아예 종교 자체를 버리기로 결단한 순간일 수도 있고요, 사회의 아픔에 침묵하는 것에 실망했거나 정치적인 입장과 견해가 달라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은 가족 친지나 동창생들과 거리를 두겠다고 다짐한 기억 같은 것 말이지요. 혹은 이전에 멋있어 보였던 패션이나 대중문화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이 갑자기 유치하거나 하찮거나 심지어 한심해 보이게 된 변화 같은 것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해피엔드>는 흔히 ‘성장’이라고 불리는 이런 경험에도 혹시 우리가, 제가 돌아보아야 할 지점은 없는지 잠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어요. 영화의 마지막, 깜짝 놀랄 만 한 두 친구의 선택과 그들 앞에 놓인 갈림길을 보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구호나 단합된 실력행사가 아니라 결국 사랑인가, 싶어지는 것이었죠. 부정하고 불합리한 거대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움직여야 한다고 믿고 달려온 ‘투사’들에게는 조금 허탈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요, 사랑 없이 하는 일들이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모른 체 할 수 없는 한 그들은 옳고 영화는 ‘해피’합니다.

사랑을 잊지 않고 사람을 잃지 않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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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덥고 이렇게 습한데 남쪽에서는 장마가 벌써 끝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네요. 마른장마라니, 올여름엔 과일이 달겠다 생각하다가 얼른 고개를 흔들어봅니다.

죄책감 없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까지 공연한 죄책감을 안겨주는 일도 없이, 좋은 것을 좋아라하며,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어울려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번 주말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가보려고 합니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살짝 설레고 있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최은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5년 7월 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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