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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며 나는 몇 번이나 생명을 더 얻었다.

2026.10.15 | 조회 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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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김광혁 대표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지난주 뉴스레터가 발행되지 않아 놀라셨지요?
혹시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지난주, 일본 여행에 다녀온 후 몸살에 걸렸고, 일폭탄이 떨어져서 초안만 써놓고 발행을 못했습니다. 대신 이번 주엔 목요일, 일요일 두 편을 발행하고 다음 주에도 두 편을 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진정한 사죄는 돈으로 해야겠지만 저는 그 정도로 넉넉한 부자가 아니니까...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써보겠습니다. ㅋㅋ 

오늘은 제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됐고 그 글들은 무엇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글자를 위한 글', '글들이 무엇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글' 뭔가 반복되는 구조를 좋아하는 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LIF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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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하다 보면 가장 반가운 아이템 중 하나가 하트입니다.

적들과 싸우다가 체력이 거의 바닥나고, 이제 한 번만 더 맞으면 게임이 끝나겠구나 싶을 때 하트 하나를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게임에서는 체력을 회복하고, 어떤 게임에서는 목숨을 하나 더 얻기도 합니다.

덕분에 죽을 뻔했던 주인공은 다시 모험을 이어갑니다.

현실에도 그런 아이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힘들고 지칠 때, 도저히 더는 못 하겠다 싶을 때 어디선가 하트 하나가 떨어진다면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저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글쓰기입니다.

저는 글을 통해 삶을 얻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글을 쓰면서 새로운 일을 얻었고, 사람을 만났고, 사랑을 했으며,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광혁 씨, 디자인 그만해요.


오래전 업계에서 만난 선배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광혁 씨, 디자인 그만해요. 그거 돈 안 돼요. 그리고 남는 것도 없어요. 돈 되는 건 우리 세대가 다 해먹었어요. 그러니 글 써요. 광혁 씨는 글 쓰는 능력이 있어요. 그걸 해요."

지금 생각해도 꽤 살벌한 조언입니다.

디자이너로 먹고사는 사람에게 디자인을 그만두라니요. 그것도 같은 업계의 큰 선배님께서 말입니다. 보통은 열심히 하면 언젠가 성공할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마련인데, 이분은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디자인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디자인을 하고 있고, 여전히 좋아합니다.
다만 그 선배의 말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 중에 디자인 말고도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때부터 글을 더 열심히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적고, 감독과 배우의 이야기를 찾아보고,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와 문화까지 들여다봤습니다. 누가 원고료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에 연재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썼습니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제가 발견한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 편, 두 편 쓰다 보니 어느새 영화에 관한 글이 100편쯤 쌓였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화 칼럼을 써달라는 제안이 들어온 겁니다.

제가 좋아서 쓰던 글이 어느 순간 일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일이 누군가에게는 저를 선택할 이유가 된 겁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랫동안 디자인 일을 하다 보니 업계의 잘못된 관행이나 문제점들이 보였습니다. 그것들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을 잘하는 방법보다 왜 우리나라 디자인 업계가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지,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디자인 칼럼을 써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글들이 쌓이고, 제가 해온 디자인 작업과 생각들이 알려지면서 당시 문화재청 소속 국립무형유산원의 디자인 자문을 맡을 기회까지 생겼습니다.

돌아보면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디자인을 그만두라는 선배의 조언을 듣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글 덕분에 오히려 디자이너로서 더 많은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저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을까요?

아마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관점을 가진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이 알기는 어려웠을 테니까요.

글은 제가 가진 생각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이었고, 그 생각들이 새로운 일을 데려왔습니다.

 


현대판 세헤라자드의 연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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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글을 쓰면서 일만 얻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얻었습니다.

제가 쓴 글을 읽고 연락해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함께 일할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제 생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은 꽤 특별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합니다. 혼자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을 뿐인데, 제가 쓴 문장들이 저보다 먼저 누군가에게 가서 말을 걸고 있었던 겁니다. 두 발 달린 글이 천리를 넘게 건너간 것이지요. 신기하죠?

물론 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글은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들지만 어떤 글은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글을 통해 알게 되니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싫어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그래도 글쓰기를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글을 쓰면서 참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전 여자친구와 했던 조금 특이한 게임입니다.

매일 아침 여자친구가 저에게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단어 세 개를 던져줬습니다.

'자두, 아르헨티나, 고질라.'

'팝핀댄스, 고등어, 양로원.'

이런 식이었습니다.

대체 자두와 고질라, 고등어와 양로원으로 무슨 이야기를 만들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단어 세 개를 가지고 하루 종일 이야기를 구상했습니다. 전혀 관계없는 단어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고민하고, 그걸 한두 장 분량의 짧은 소설로 썼습니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현대판 세헤라자드였던 셈입니다.

물론 원작의 세헤라자드는 이야기를 끝내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처지였지만, 저는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여자친구에게 재미없다는 평가를 듣는 정도였습니다. 물론 여자친구는 제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하며 좋아했고, 때로는 그 이야기에 살을 붙여 함께 세계관을 만들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아마 목숨을 건 세헤라자드 쪽보다 제 쪽이 훨씬 편했지요. ㅋㅋ


그녀가 꾸었던 꿈도 종종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이런 꿈을 꿨다고 하더군요.

"바다로 괴물을 잡으러 간 어부들의 마을이 있었어.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들은 장사를 시작했고 그게 대박이 났어."

보통은 '특이한 꿈을 꿨네?' 하고 넘어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가지고 용과 마녀가 등장하고, 거짓과 진실이 복잡하게 얽힌 판타지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들려준 짧은 꿈에 제가 살을 붙이면서 등장인물과 사건이 늘어나고, 하나의 세계관이 만들어진 겁니다.

우리는 이런 놀이를 즐겼습니다.

특별히 문학적인 성취를 이루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출판을 하거나 돈을 벌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재미있는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 썼던 이야기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습니다.

한두 장에 불과했던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의 아이디어가 되고, 함께 상상했던 인물과 설정들이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여러 챕터로 묶이며 확장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어 보였던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 다듬고, 새로운 문장을 더하면서 웹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았던 놀이가 지금 제가 쓰는 소설의 밑바탕이 된 겁니다. 그때 그녀가 던져준 단어들이 몇 년 뒤 제가 만드는 세계에서 살아 움직일 줄 누가 알았을까요.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쓸모가 없어 보여도,
자신이 즐겁게 쓴 글은 언젠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녀는 이제 제 곁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만들었던 이야기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동안에는 그 이야기들도 계속 이어질 겁니다.

 


매일 한 장씩 미래를 훔쳐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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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크게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업에 실패했을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지고 나니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제가 매일 하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사업계획서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한 장씩 썼습니다.

당장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함께 사업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업이 실제로 가능할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썼습니다.

오늘은 이런 사업을 하면 어떨까. 이런 상품을 만들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이런 브랜드가 있으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제가 가보고 싶은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세상에 없는 서비스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현실성은 잠시 접어뒀습니다.

어차피 당장 사업을 시작할 것도 아닌데 굳이 현실적인 문제부터 따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누가 투자할지, 성공할 수 있을지는 나중 문제였습니다.

그냥 즐겁게 썼습니다.

저에게 그 시간은 일종의 가상현실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전혀 다른 미래를 살아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제가 만든 브랜드가 세상에 나오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렇게 한 장의 사업계획서를 쓰는 동안에는 적어도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매일 글을 쓰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행복과 희망을 훔쳐보고 있었던 겁니다.

현실에서는 힘든 일이 많았지만 종이 위에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해도 괜찮았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새로운 사업 하나가 망하면 다음 날에는 또 다른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매일 새로운 회사를 창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모두 상상 속 회사였습니다. 직원도 없었고, 매출도 없었고, 세금 낼 일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

그런데 지금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썼던 사업계획서들을 다시 꺼내 실제 사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터무니없어 보였던 아이디어들을 현실적인 계획으로 바꾸고,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고, 실제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성공한 사업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잘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저는 지금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미리 생각해두었습니다. 당장 내일을 살아갈 힘이 없어 시작했던 글쓰기가 몇 년 뒤의 저에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주고 있는 겁니다.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잊지 않으려고 쓴 글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글쓰기와 독서를 좋아하셨던 분이라 제가 무엇을 쓰는지 늘 궁금해하셨고, 제 이름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응원해주셨습니다.

아버지도 비슷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디자인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매번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받아서 디자인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보기 좋게 만드는 일을 하는 아들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제 이름으로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고 책이 출간되자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남의 글을 디자인하던 아들이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된 겁니다.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몰랐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의 작은 성취 하나에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말입니다. 제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저보다 더 좋아해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때는 앞으로도 그런 모습을 계속 보여드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좋은 글을 쓰고, 더 좋은 책을 내고, 언젠가는 부모님께 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더군요.

부모님은 이제 계시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이상한 단어 세 개를 던져주던 그녀도 하늘로 떠났습니다.

살면서 가장 기쁜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랫동안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긴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문장으로 이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몇 문단을 이어 쓰는 일조차 힘들었습니다. 오래전에 쓰다 만 소설과 에세이, 책으로 만들려고 모아둔 자료들이 컴퓨터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부모님도 여자친구도 제가 쓴 글들이 책으로 나오길 기대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 글을 읽고 응원해주길 바라셨습니다. 여자친구의 유언 중 하나가 자기와 나눴던 이야기들로 글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펴거나 책상 앞에 앉으면 먼저 떠난 사람들과의 그리운 일상만 생각났거든요. SNS에 쓰는 글도 그 시기에 멈췄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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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기간 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절 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놓았던 독서를 다시 시작했고,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생각이 떠오르면 짧게 적었습니다. 긴 글은 쓸 수 없었지만 몇 줄 정도는 쓸 수 있었거든요.

그러다 포스트잇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크기도 색깔도 다른 포스트잇을 여러 종류로 샀습니다. 어디든 붙일 수 있는 작은 메모지도 샀습니다. 책을 읽다가 생각이 나면 적고, 음식을 하다가 무언가 떠오르면 적었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의 재료와 조리법을 기억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꽃게탕은 어떻게 끓이셨는지, 어떤 재료를 넣으셨는지, 무슨 맛이 났는지.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먹었던 음식이나 잊고 싶지 않은 추억도 적었습니다.

슬픈 날에는 왜 슬픈지 적었고,
우울한 날에는 우울하다고 적었습니다.
모처럼 행복한 날에는
무엇 때문에 행복했는지 적었습니다.

대단한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날그날의 감정과 생각을 적은 짧은 메모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쓴 메모들을 냉장고에도 붙이고, 벽에도 붙였습니다. 눈에 띄는 곳마다 덕지덕지 붙여놓았습니다.

잊지 않으려고요.

그때는 자꾸 무언가를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 평범하게 지나갔던 하루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의 맛도,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들도 언젠가는 희미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적었습니다. 긴 글을 쓰지 못하니 짧게라도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도 아니었고, 좋은 문장을 만들기 위한 글도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작가가 되려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고 싶은 삶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돌아보면 참 이상합니다.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썼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낸 뒤에는 잊고 싶지 않은 과거를 쓰고 있었으니까요. 하나는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주었고, 다른 하나는 지나온 삶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그 두 가지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저를 붙잡아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저는 계속 살아야 했으니까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저는 오랫동안 멈춰 있던 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 안에 방치했던 원고들을 꺼내고,
오래전에 적어둔 메모들을 정리했습니다.
쓰다가 멈춘 소설을 다시 이어 쓰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놓았던 짧은 메모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에 관한 이야기,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 우울했던 날의 감정, 사업이 망했을 때 상상했던 미래까지. 당시에는 그저 잊지 않으려고 적었던 것들이 이제는 에세이의 소재가 되고, 소설의 장면이 되고, 새로운 사업의 아이디어가 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문장이 이어지고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한동안 멈춰 있던 제 삶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어디까지 쓸까.
이 인물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써볼까.

오랫동안 사라졌던 기대감이 다시 생겼습니다. 사람이 내일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새삼 알게 됐습니다. 물론 글을 쓴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있는 밤이 갑자기 즐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보고 싶고, 여전히 슬픕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을 가지고도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긴 글을 쓰고 뉴스레터를 시작하자 예전처럼 신기한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안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협업 제안도 들어오고, 자신의 매체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도 생겼습니다.

제가 세상에 나가서 무언가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시작하니 세상이 다시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겁니다. 물론 그동안 쌓아온 일과 관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에게 제가 다시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글은 또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글쓰기를 가르칠 때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좋은 문장을 쓰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글을 쓰는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


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가난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도 쓸 수 있고, 특별한 자격이 없어도 쓸 수 있습니다. 비싼 장비나 사무실이 없어도 됩니다.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만 있어도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기록하고,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글로 만들어 놓은 세계가 가끔은 현실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작가들이 절망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쓴 이야기가 훗날 베스트셀러가 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사람들에게 읽히는 작품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글을 쓴다고 누구나 유명한 작가가 되거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글이 가진 힘을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었는지로만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한 편의 글이 새로운 직업을 얻는 계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법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남기는 일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글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 아닐까요.

저는 실제로 그랬습니다.

좋아서 쓴 영화 글이 칼럼이 되었고, 디자인에 관한 생각이 새로운 일을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장난처럼 만들었던 이야기가 소설이 되었고, 사업에 실패해 상상으로만 썼던 사업계획서가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밑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고 쓴 짧은 메모들이 지금 제가 쓰는 에세이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글은 저를 먹여 살렸고, 어떤 글은 제가 살아갈 미래를 만들었으며, 어떤 글은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글을 쓰는 일을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글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 글을 쓰세요.


그러니 여러분, 힘들고 지쳤다면 글을 쓰세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죽도록 파고들어 보세요. 바닥이 보일 때까지 파고들고,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덕질을 해보세요.

영화를 좋아한다면 영화를 보고 글을 쓰세요. 음악이 좋다면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게임을 좋아한다면 게임 이야기를 쓰세요. 여행이나 음식, 그림이나 장난감, 오래된 건물이나 사라져가는 골목길도 좋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일이라도 괜찮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넣어보세요.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그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써보세요. 그냥 정보를 정리하는 글에서 끝내지 말고 그 안에 자신의 삶을 녹여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영화를 본 사람도 많고, 똑같은 장소를 여행한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여러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여러분과 똑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야기는 특별합니다.

꼭 잘 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문장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처음 쓴 영화 글들이 모두 훌륭했을 리도 없고, 여자친구와 놀면서 썼던 단편소설들이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을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글을 쓰잘데기 없다고 쓰지 않았다면
지금 쓰는 소설이나 에세이들도 없었겠지요.


그러니 그냥 쓰세요.

지금의 삶이 너무 힘들다면 자신이 살고 싶은 미래에 관한 글을 써도 좋습니다. 언젠가 하고 싶은 일, 가보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 만들어보고 싶은 사업을 적어보세요.

현실성이 조금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글로 쓰는 데는 돈이 들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너무 힘들어서 긴 글을 쓸 수 없다면 한두 줄이라도 적어보세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기분이 좋았는지, 무엇 때문에 슬펐는지. 좋아하는 사람이 해준 음식이 생각나면 그 음식에 관한 기억을 적어도 좋습니다.

문장을 멋있게 만들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습니다. 저처럼 냉장고에 덕지덕지 붙여놓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견뎌왔으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글들이 몇 년 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을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그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글을 쓰기 힘드시다고요?
그렇다면 조용히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 할인된 가격으로 글쓰기 강의를...

ㅋㅋㅋ

 


♥+1


예전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 글을 읽고, 제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고, 언젠가는 작가로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같습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고, 제가 쓴 책을 더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때는 글을 써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면, 지금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태어나면서 주어진 생명은 하나뿐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이나 삶을 포기하고 싶어지고, 또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어떤 사람은 음악이나 여행, 새로운 일이나 꿈을 통해 살아갈 이유를 찾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글쓰기였습니다.

사업을 잃었을 때는 미래를 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을 때는 과거를 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현재를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글을 쓸 겁니다. 누가 읽어주지 않더라도, 당장 원고료가 생기지 않더라도, 어디에 발표할 수 있을지 모르더라도 계속 쓸 생각입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써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게임 속 주인공은 하트를 하나 먹으면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렇다고 적이 사라지거나 어려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다시 싸워야 하고, 다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만 조금 더 살아갈 기회를 얻었을 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삶이 갑자기 쉬워진 것은 아닙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고,
그리운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그래도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도 한 문장을 쓰고,
다음 문장을 생각하고,
내일은 무엇을 쓸지 궁리합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제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하트가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1

오늘도 생명을 하나 더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만의 하트를 하나 만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 하트는 지금 여러분이 쓰기를 망설이고 있는 첫 문장 속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저도 오늘 또 글을 쓰러 갑니다.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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