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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라카미 류의 파장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뱀에게 피어싱까지. 소설, 영화, 음악과 일본 문화에 남긴 흔적들

2026.10.27 | 조회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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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혁 대표
  

RIP 무라카미 류 (1952–2026)

 
  RIP 무라카미 류 (1952–2026)  

구독자 님. 혹시 무라카미 류의 소설 읽어보셨나요?

며칠 전 파란색에 관한 뉴스레터를 쓰다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떠올렸습니다. 파란색에 관한 영화와 음악, 소설을 찾다 보니 오래전에 좋아했던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 생각난 겁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무라카미 류는 지난 10월 17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23일 일본 출판사가 그의 별세를 알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작가여서 따로 추모글도 썼습니다. 그의 책을 읽으며 보냈던 젊은 시절과 기억들을 떠올려 보니 생각보다 꽤 많은 소설을 읽었더군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시작으로 『타나토스』, 『미소 수프』, 『러브&팝』, 『69』, 『토파즈』, 『엑스터시』, 『오디션』, 『코인로커 베이비스』까지.

지금 제목만 늘어놓아도 어쩐지 20대의 제 취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기분입니다. 😅

그의 작품에는 마약과 섹스, 폭력, SM, 범죄와 광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작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쓸까 싶다가도, 어느 순간 다음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그의 추모를 위한 글을 쓰며 무라카미 류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새삼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소설만 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영화를 직접 만들었고, 음반을 제작했으며, 경제인들을 인터뷰하는 방송 진행자로도 활동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좋아했던 다른 작가의 책에도 그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쯤 되니 한 사람의 작가가 남긴 흔적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976년, 조금 이상한 청춘


1976년 일본 문학계에 스물네 살의 신인이 등장합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다니던 청년 무라카미 류였습니다.

그가 발표한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군조신인문학상과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단숨에 화제가 됩니다. 이야기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미군기지 근처에 모여 사는 젊은이들. 마약과 섹스, 폭력과 음악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을 거쳐 풍요로운 사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도 강했습니다. 그런데 무라카미 류의 소설 속 젊은이들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돈과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면서도 정작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하지만 좀처럼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런 청춘을 그리는 방식도 이전 세대의 문학과 달랐습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마약과 섹스가 나오지만 그에 관해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도 않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판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이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무라카미 하루키와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을 가지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이들의 정서적인 고립과 허무에서 오는 외로움을 그려냈고 무라카미 류는 그 고립과 허무와 외로움을 광란과 질주, 폭력으로 그려냈습니다.

독자가 당황할 만큼 생생하고 가까이 느껴지게 말이죠.

무라카미 류의 고향 '사세보' 풍경
무라카미 류의 고향 '사세보' 풍경

무라카미 류는 1952년 나가사키현 사세보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세보는 미군기지가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 문화와 일본 문화가 뒤섞인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작품에 미국의 대중문화, 록 음악, 미군기지와 주변의 젊은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들의 이런 배경을 참 좋아합니다. 한 작가의 세계관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가 자랐던 동네의 공기와 거리의 풍경, 어릴 때 듣던 음악과 만났던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유명한 작가들 가운데 항구도시 출신이 꽤 많습니다. 『토지』의 박경리와 시인 김춘수는 통영 출신이고, 『탁류』와 『태평천하』의 채만식은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율리시스』의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 『올리버 트위스트』와 『위대한 유산』의 찰스 디킨스는 영국 포츠머스 출신입니다.

항구도시 출신이라고 모두 독특한 작품을 쓰는 건 아니겠지만, 바다를 통해 낯선 문화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환경이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통영 출신의 박경리가 젊은 시절 인천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하기도 했다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또 다른 인천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군요.

저 역시 인천에서 자랐습니다.

항구에는 원래 여러 나라의 문화가 들어옵니다. 그것들이 뒤섞이고, 충돌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구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모두 무라카미 류나 제임스 조이스 같은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항구도시에서 자랐지만
짜장면 이야기나 쓰고 있으니까요. ㅋㅋ


소설이 영화관으로 들어갔을 때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영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의 소설 못지않게 영화 쪽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무라카미 류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는 1979년 자신의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직접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영화 연출을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설로 만든 세계를 직접 스크린에 옮긴 겁니다.

어떤 용감한 분이 풀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뒀더군요검색어: Almost Transparent Blue (1979)
어떤 용감한 분이 풀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뒀더군요
검색어: Almost Transparent Blue (1979)

이후에도 여러 영화를 연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 1992년의 〈도쿄 데카당스〉일 겁니다. 원제는 〈토파즈〉입니다. 도쿄의 SM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성적 욕망과 고독, 돈과 권력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노골적인 장면들 때문에 에로틱한 영화로 기억하는 분들도 많지만, 제게 흥미로운 것은 그 안에 담긴 도쿄의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 세련되고 화려한 도시 속에서 고급 호텔과 좋은 옷, 비싼 물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딘가 심각하게 망가져 있습니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져 가던 무렵에 만들어진 영화라 그런지 찬란했던 도쿄와 그안에 숨은 욕망들을 보는 맛이 있는 영화입니다.

놀랍게도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사람은 사카모토 류이치입니다. 무라카미 류와 사카모토 류이치. 이 조합만으로도 다시 한번 찾아볼 이유가 생기지 않나요?

포스터… 다시 보니 과격하군요. 영화는 더…
포스터… 다시 보니 과격하군요. 영화는 더…
연령제한 영상입니다. 왜인지는 아시겠죠?

 

더 재미있는 것은 그의 소설이 다른 감독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1998년에는 안노 히데아키가 『러브&팝』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일본 청소년의 불안과 고독을 그리던 감독이 이번에는 실사 카메라를 들고 시부야의 여고생들을 따라다닌 겁니다.

〈러브&팝〉은 특이한 카메라 앵글과 어안렌즈, 당시의 디지털 영상 기술을 활용한 실험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실사영화를 찍으면서 카메라를 가지고 온갖 실험을 해본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요즘 상업 영화를 찍는 히데아키를 생각하면 그 시절 얼마나 객기가 넘쳤는지 보입니다.

그 시절의 안노 히데아키. 젊었네요 ㅋ
그 시절의 안노 히데아키. 젊었네요 ㅋ

그리고 드디어 1999년에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오디션〉이 나옵니다.

이 영화는 제게 조금 특별합니다. 저는 『오디션』을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만났거든요. 당시 미이케 다카시는 제가 정말 좋아했던 감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일본의 장르영화, 특히 폭력과 광기, 기괴한 유머가 뒤섞인 영화들을 좋아했던 시절입니다.

미이케 다카시는 그런 영화를 누구보다 과감하게 만드는 감독이었습니다. 잔인하고 불편한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다가도, 갑자기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 관객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디션〉도 원작이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라는 사실보다 미이케 다카시가 만든 영화라는 이유로 먼저 봤습니다.

이 영화의 전개는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아내를 잃은 남자가 재혼 상대를 찾기 위해 가짜 영화 오디션을 연다는 설정부터 기괴합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멜로드라마처럼 진행되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시이나 에이히가 연기한 '아사미'.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그 유명한 소리.

"키리키리키리……"

저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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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어떤 장면인지 바로 떠오르실 겁니다. 못 보신 분들께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직접 경험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물론 보고 나서 저를 원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단순히 잔인한 장면 때문에 무서운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연애 이야기처럼 보이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이 더 불편하고 무섭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무라카미 류의 원작 소설을 찾아 읽었습니다.

물론 소설도 좋았습니다. 영화가 미이케 다카시 특유의 연출로 관객의 감각을 공격한다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따라가며 다른 방식으로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같은 이야기를 읽고 보는 경험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재밌었습니다. 어떤 작품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고요.

저는 소설과 영화〈오디션〉둘 다 좋았습니다. 당시 좋아했던 감독과 작가가 우연히 같은 작품에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게는 상당히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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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는 소설 『69』가 영화로 만들어집니다.

재일한국인 감독 이상일이 연출하고, 쿠도 간쿠로가 각본을 썼습니다. 츠마부키 사토시와 안도 마사노부가 출연했지요. 이 영화는 먼저 소설을 읽었고, 이후에 이상일 감독과 쿠도 칸쿠로가 함께 했다는 소식에 한껏 기대를 하고 봤습니다. 둘 다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감독과 작가였으니까요.

〈69〉는 〈오디션〉과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1969년 무라카미 류의 고향인 사세보를 배경으로 학교를 점거하고 영화제를 열려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록 음악과 학생운동, 반항과 연애가 뒤섞인 명랑한 청춘영화에 가깝습니다. 한창 폼 좋을 때 쿠도칸이 각본을 썼으니 말해 뭐해요. 재밌습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데 어떤 영화는 보고 나면 기분이 영 좋지 않고, 어떤 영화는 젊은 시절의 장난스러운 반항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감독들이 한 작가의 세계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이 꽤나 흥미롭지요.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순간, 작가의 세계에 다른 창작자의 취향이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다시 다른 영화에 영향을 주고, 관객의 기억 속으로 들어갑니다.

한 권의 소설이 생각보다 멀리 여행하는 셈입니다.


'뱀에게 피어싱'과 무라카미 류


이번에 자료를 찾다가 가장 반가웠던 이름은 가네하라 히토미였습니다. 제가 한동안 상당히 좋아했던 일본 작가입니다. 

특히 아실 분은 아실 듯한 『뱀에게 피어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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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스바루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한 작품으로, 이듬해 아쿠타가와상까지 수상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혀에 피어싱을 하고, 문신을 새기고, 자신의 몸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열아홉 살 여성이 등장합니다. 조금 과격한 피어싱과 문신, SM과 폭력적인 관계가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부터 상당히 놀랐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까지 무언가를 느끼려 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감각을 통증과 쾌락 속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저는 이런 파격적인 소재에 이미 단련되어 있었습니다. 무라카미 류의 『토파즈』나 『엑스터시』를 읽었을 때 느꼈던 낯선 감각과도 어딘가 닮아 있었거든요.

  요시타카 유리코 이뻐요  
  요시타카 유리코 이뻐요  

저는 『뱀에게 피어싱』도 소설을 먼저 읽고 나중에 영화를 봤습니다.

2008년 개봉한 영화 〈뱀에게 피어싱〉은 일본의 유명 연극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가 감독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당시 신인배우였던 요시타카 유리코를 좋아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영화에서 그녀가 연기한 루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자신의 몸에 피어싱을 하고 문신을 새기는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면서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요시타카 유리코는 그 불안정한 인물을 인상적으로 연기했습니다. 그때부터 좋아했던 배우인데,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인기 배우 중 한 명이 됐습니다. 당시 신인이었는데 그 정도로 연기하는 것 보고 잘 될 줄 알았어요.

이번에 생각난 김에 영화를 다시 찾아봤는데 출연진이 꽤 화려했습니다. 이우라 아라타, 고라 겐고, 오구리 슌, 후지와라 타츠야, 가라사와 도시아키, 이치카와 엔노스케, 그리고 재일한국인 배우 성선임(활동명 소닌)까지.

이치카와 엔노스케는 당시 이치카와 카메지로라는 이름으로 출연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배우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당시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 한 작품에 모여 있는 모습을 다시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요시타카 유리코지만요. ㅎㅎ

이 영화는 그 시절 갸루 패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시절 갸루 패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보니 실제로 가네하라 히토미는 어린 시절 무라카미 류와 야마다 에이미 등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뱀에게 피어싱』 일본 문고판의 해설을 쓴 사람이 바로 무라카미 류입니다. 응??? 그랬었나? 하고 집에 있는 일본 문고판 책을 다시 읽어보니 무라카미 류가 있네요. 어라???

이 사실을 발견하고 조금 반가웠습니다. 1976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가, 28년 뒤 같은 상을 받은 젊은 작가의 소설에 해설을 썼습니다. 그것도 두 작품 모두 당시의 젊은 세대와 섹스, 폭력, 육체의 감각을 파격적으로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둘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이 주제를 다루긴 합니다.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 남성의 시선을 통해 욕망과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면, 가네하라 히토미는 자신의 몸을 바꾸고 훼손하면서까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찾으려는 젊은 여성의 내면에 훨씬 깊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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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뱀에게 피어싱』에서 몸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대상인 동시에,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같은 고통을 다루더라도 누가 그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소설이 되는 겁니다. 이 맛에 소설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당시에는 일본의 이런 계열 소설들을 꽤 열심히 찾아 읽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취향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자극적인 장면을 읽으려고 책을 찾았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자극적인 장면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때는 밤마다 나방처럼 불타오르는 20대였단 말입니다. ^^'

그 시절 저에겐 그 소설 속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가 더 궁금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망가뜨릴까요? 왜 평범한 행복을 거부하고 위험한 관계를 찾아갈까요? 정작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본인도 이유를 모를 것 같은 행동들 말입니다. 이런 질문을 품고 읽었던 소설들이 지금 생각하면 제 취향의 한 부분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의심만 더 살테니... 여기서 그만...)

무라카미 류가 이런 장르로 일본의 파격적인 문학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전에도 육체와 성, 폭력과 금기를 탐구한 작가들은 많았습니다. 다만 그가 젊은 세대의 감각을 문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중요한 작가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다른 세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그 세계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요시타카 유리코 이쁘니까 한 장 더...
요시타카 유리코 이쁘니까 한 장 더...

무라카미 류와 쿠바 음악?


여기서 이야기를 조금 엉뚱한 곳으로 돌리겠습니다.

쿠바입니다.

무라카미 류와 쿠바라니, 조금 의외이지 않나요?

그는 1991년 쿠바를 처음 방문한 뒤 쿠바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NG la Banda라는 밴드에 매료됐습니다. 이 밴드는 전통적인 쿠바 음악에 재즈와 펑크, 록 등의 요소를 결합하며 현대 쿠바 음악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 낸 그룹입니다.

무라카미 류는 이 음악을 좋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직접 음반을 제작하고, 일본 공연을 기획하고, 쿠바 음악가들을 일본에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 레이블을 통해 쿠바 음악 음반들을 제작했습니다. 심지어 NG la Banda의 곡 중에는 〈Murakami Mambo〉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소설가의 이름이 쿠바 밴드의 노래 제목이 된 겁니다.

 

사실 저는 그전부터 쿠바와 라틴아메리카 음악을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맘보와 살사, 룸바는 물론 누에바 트로바 같은 음악도 즐겨 들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도 꽤 많이 들었습니다. 라이 쿠더가 참여했던 그 유명한 음반과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말입니다. 

나이 든 쿠바 음악가들이 다시 모여 연주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음악도 좋았지만 그들의 주름진 얼굴과 오래된 악기, 아바나의 거리 풍경이 참 좋았습니다. 나중에 한 번 가봐야하지 하고 20년이 넘게 흘렀네요.

쿠바 음악뿐 아니라 브라질의 보사노바,
아르헨티나의 탱고도 좋아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음악을 찾아 듣기가 편하지 않았습니다. 음반을 구하거나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야 처음 듣는 음악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런 음악들을 꽤 열심히 찾아 들었습니다. 맘보와 살사의 복잡한 리듬도 좋았고, 보사노바의 나른한 분위기와 탱고의 묘한 긴장감도 좋아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 나이에 참 다양한 음악을 닥치는대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식욕만큼이나 음악과 영화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네요. 덕분에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 박식한 덕후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대학 시절의 제 음악 취향도 책장에 꽂혀 있던 소설들만큼이나 이것저것 뒤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무라카미 류가 쿠바 음악에 깊이 빠져 음반까지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의 반가움은 참…

좋아하는 작가가 새로운 음악을 소개해 준 것이 아니라, 이미 좋아하던 음악을 그 작가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바다를 건넌 한없이 먼 거리감이 단번에 줄어드는 느낌이랄까요. 그가 직접 제작한  NG la Banda의 음반과 〈Murakami Mambo〉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무라카미 류라는 사람이 더 좋아졌습니다.

1992년 일본에서 녹음된  NG la Banda의 앨범 『Cabaret Panorámico』에는 〈Murakami Mambo〉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라카미 류가 제작에 참여한 음반입니다. 소설가가 좋아하는 밴드를 일본으로 불러 음반을 만들고, 그 밴드는 소설가의 이름을 붙인 곡을 연주합니다.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인 팬 활동 아닐까요? ㅋㅋ

 

이야기 나온김에 맘보 듣고 가시죠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생각하면 음악이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릅니다. 미군기지 주변의 록 음악에서 출발해 『69』의 1960년대 대중문화, 그리고 쿠바의 살사와 룸바까지. 그에게 음악은 작품을 꾸미는 배경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쿠바 음악가들의 음반을 제작했고, 공연을 통해 일본의 청중들과 그들을 연결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예술가를 기억할 때 가장 유명한 작품만 떠올리지만, 그 사람이 다른 문화에 남긴 흔적은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무라카미 류는 『코인로커 베이비스』의 작가일 겁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오디션〉의 원작자이겠지요.

그런데 쿠바 음악을 좋아하는 일본의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음반과 공연을 소개해 준 프로듀서로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책보다 음악이 먼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처럼 이미 쿠바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좋아하던 작가를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면서 당시 좋아했던 쿠바 음악들도 다시 들어봤습니다.

오랜만에 듣는데 여전히 좋더군요.

 

쿠바하면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뺄 수 없지요 

'13세의 헬로워크' 뜻밖의 책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어둡고 강렬한 이야기들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가 쓴 책 가운데 『13세의 헬로워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2003년에 출간된 청소년을 위한 직업 안내서입니다.

동물과 스포츠, 미술과 음악, 과학과 요리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514가지 직업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 책이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재미있었습니다. 마약과 섹스, 폭력과 절망을 그리던 작가가 열세 살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묻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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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송에서도 꽤 오랫동안 활동했습니다.

2006년부터 2026년 3월까지 TV도쿄의 경제 토크 프로그램 〈캄브리아 궁전〉에서 고이케 에이코와 함께 진행을 맡았습니다. 대기업 경영자부터 다양한 분야의 사업가들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일과 경제, 기업과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생각해 보면 조금 묘한 조합입니다. 소설에서는 사회의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그리던 작가가 방송에서는 사회를 움직이는 경영자들을 만나 질문을 던진 겁니다. 어쩌면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사람과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그 질서에서 벗어나고, 누군가는 그 질서를 새로 만들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해 버리기에는 그의 작품 세계가 너무 복잡한 것 같기도 합니다.

〈캄브리아 궁전〉에서 진행을 맡았던 무라카미류 (맨 오른쪽)
〈캄브리아 궁전〉에서 진행을 맡았던 무라카미류 (맨 오른쪽)

저도 『엑스터시』를 쓴 사람이 『13세의 헬로워크』를 썼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헷갈립니다. 같은 사람이 썼다는 걸 모르고 읽으면 전혀 다른 작가의 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원래 그렇게 단순한 존재는 아니니까요. 이해합니다.

소설가라고 평생 소설만 생각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한때 절망을 이야기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미래를 궁금해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요. 저역시 30대까지는 엄청나게 비관적이고 까칠한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꽤 긍정적이고 푸근한 사람이 된 것 처럼 말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의 부고 이후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걱정됩니다. 
20대에 그토록 열광했던 소설을
지금 다시 읽어도 같은 기분일까요?

당시에는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던 장면들이 지금은 불편하거나 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여성과 섹스, 폭력을 다루는 방식은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 많습니다. 이야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파격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장면을 옹호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좋아했던 작가에게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좋아했던 영화나 소설을 다시 보면 가끔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멋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이 사실은 상당히 무례한 사람이었다든지, 별생각 없이 넘겼던 장면이 지금은 하루종일 마음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되기도 합니다. 작품은 그대로인데 읽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요. 무라카미 류의 소설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놀랐던 노골적인 장면들,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한 그때는 몰랐던 세계, 이제는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비틀릴 수 있는지 알게 되었고, 끝을 알 수 없는 광기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제 다시 읽으면 다른 것들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의 일본 사회, 미국 문화의 영향, 도시의 변화, 그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외로움 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을 읽던 제 젊은 시절이 떠오르겠지요.

첨부 이미지

젊은 시절에는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낯설고 위험한 세계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다시 살펴보니 그가 작품 밖에서 살아온 방식에도 관심이 갑니다. 작가가 영화감독이 되고, 음악 프로듀서가 되고, 방송 진행자가 되고, 다시 소설을 쓰는 삶.

하나의 직업이나 장르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조금씩 그런 삶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저는 그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열심히 읽고,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찾아봤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궁금해했고요.

그런데 그때는 몰랐습니다.

시간이 꽤 흐른 뒤 제가 하는 일과 살아가는 방식에서 좋아했던 작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줄은요. 이런 게 어쩌면 한 작가가 남기는 영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고 감동을 받거나 어떤 문장을 오래 기억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좋아했던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가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에 조금씩 영향을 받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자신도 비슷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동안 그런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Walker Evans, 

Two Elderly Men in Conversatio, 1936
  Walker Evans,  Two Elderly Men in Conversatio, 1936

이번에 무라카미 류에 관한 자료를 찾으며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1976년의 일본 문학에서 시작해 미이케 다카시와 안노 히데아키의 영화로 이어졌고, 가네하라 히토미의 소설을 거쳐 쿠바 음악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을 위한 직업 안내서와 경제 방송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여러 분야에 발을 걸치고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그의 작품은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읽힐 겁니다.
영화로 다시 발견될 수도 있고, 다른 작가가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중에는 저처럼 오래전에 그의 소설을 읽고 전혀 다른 책을 찾아 읽게 된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저도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이 꽤 남아 있습니다.

오랜만에 『코인로커 베이비스』부터 다시 읽어볼까 합니다. 그리고 『토파즈 』도요. 사실 무라카미 류의 『 피어싱』 (뱀에게 피어싱 아님)을 아직 못읽어 봤는데 그것도 좋겠군요. 젊었을 땐 자극적이고 야한 소설 찾는다고 읽었지만 이제는 예전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며 사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으니까요.

이번 글을 쓰면서 일본소설을 모아놓은 책장을 보니
꽂혀있는 소설들의 제목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군요.

거참......

제 책장은 손님들 오실 땐
천으로 가려 두어야 겠습니다.

표지 보니까 일본판 '피어싱'이 너무 갖고 싶네요. 뚝배기...
표지 보니까 일본판 '피어싱'이 너무 갖고 싶네요. 뚝배기...

재밌으셨나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밝은 이야기를 가져오겠습니다. ☺️

그럼 다음 뉴스레터에서 뵙겠습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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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잉큐의 프로필 이미지

    잉큐

    0
    약 9시간 전

    오늘 뉴스레터는 사실 아는 단어가 하나도 없이 낯설어서 외국어 독해하듯 읽었습니다만, 다양한 주제와 소재들이 등장해서 역시나 좋았습니다ㅎㅎ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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