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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통하겠느냐?

1782년 《위험한 관계》에서 2026년 넷플릭스 《스캔들》까지, 244년 동안 반복된 유혹의 게임

2026.09.25 | 조회 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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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혁 대표

구독자 님.

최근 넷플릭스 《스캔들》 보셨나요?

저는 궁금해서 공개되자마자 봤습니다. 손예진, 지창욱, 나나에 정지우 감독. 거기에 제가 꽤 좋아했던 2003년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를 23년 만에 다시 드라마로 만든다고 하니 안 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이 이야기가 예전보다 재미없어졌지?

화면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의상도 아름답고 미술도 화려합니다. 2003년에는 두 시간 남짓했던 이야기가 8부작이 됐으니 인물을 들여다볼 시간도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2003년 영화보다 덜 야했고, 덜 위험했고, 무엇보다 덜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아마 《스캔들》을 본 사람 중에서도 이 이야기의 원작이 '244년 전에 나온 프랑스 소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이 꽤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조금 멀리 가보겠습니다.

1782년까지요.

《스캔들》의 진짜 원조를 찾아서 같이 시간여행을 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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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175통의 편지에서 시작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7년 전인 1782년.

군인이었던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Pierre Choderlos de Laclos, 1741~1803) 가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를 발표합니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175통의 편지 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서간체 소설입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단톡방 캡처와 DM만으로 한 시즌을 끝내는 셈입니다.

물론 내용은 웬만한 단톡방보다 훨씬 살벌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메르테유 후작부인과 발몽 자작이 있습니다. 둘은 한때 연인이었고 이제는 서로의 욕망과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공범입니다. 사람을 유혹하고, 타락시키고, 그 과정을 서로에게 보고합니다.

Jean-Honoré Fragonard, 

The Bolt (French: Le Verrou), 1777
Jean-Honoré Fragonard,  The Bolt (French: Le Verrou), 1777

누군가를 사랑에 빠뜨리는 일이 사랑이 아니라 게임입니다. 상대의 순결도, 신앙도, 결혼도, 평판도 게임에 놓인 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제목만 위험했던 게 아닙니다. 출간 당시 실제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고, 문학사에서는 아예 "succès de scandale", 스캔들에 힘입은 성공이라고 표현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1782년 프랑스에서도 있었던 겁니다.

“야, 요즘 그 책 봤어? 그거 난리 났다던데?”

244년 전에도 사람들은 남의 연애와 욕망과 스캔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인류는 이 부분에서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입니다.

그런데 《위험한 관계》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섹스가 아닙니다.

말(言, Word) 입니다.

어떤 문장을 어느 순간에 던져야 상대가 흔들리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거짓으로 쓴 편지를 진심으로 믿게 만들고, 상대의 욕망을 먼저 발견한 뒤 그것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위험한 관계》는 결국 언어로 사람을 유혹하고 파괴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24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은 변해도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별로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야기의 진짜 중심에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물론 《위험한 관계》에는 발몽이라는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의 진짜 심장은 '메르테유 후작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욕망해도 되지만 여자는 정숙해야 했던 사회에서 메르테유는 그 규칙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억압하던 규칙을 오히려 무기로 사용합니다.

어떤 얼굴을 보여줘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남자들은 여자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감춘 채 상대의 욕망부터 읽어냅니다.

그래서 이 캐릭터를 연기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예쁜 것만으로도 안 되고 연기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여자가 방 안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처럼 보여야 합니다.

발몽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지성과 자신감, 사람을 유혹하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먼저 바라보게 만드는 매력.

한마디로, 포스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포스가 《위험한 관계》를 영화로 만들 때 거의 치트키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이 메르테유에게 압도당하는 순간, 영화의 절반은 이미 먹고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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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프랑스 귀족들이 먼저 현재로 나옵니다


영화판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는 로제 바딤 감독의 《위험한 관계 1960》입니다.

1959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원작의 18세기 귀족들을 당시 현대 프랑스로 옮겨버립니다.

이 선택이 중요합니다. 《위험한 관계》를 영화로 만들 때 반드시 가발을 쓰고 프랑스 귀족이 나올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시대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인간들이 다른 인간의 감정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구조'입니다.

그것만 살아 있다면 시대는 어디로 옮겨도 됩니다.
그리고 이후 사람들이 정말 여기저기로 옮깁니다.

발몽의 기나긴 해외출장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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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liaisons dangereuses, 1960
Les liaisons dangereuses, 1960

1988년, 우리가 기억하는 메르테유가 나타납니다


1988년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가 나옵니다.

글렌 클로즈가 메르테유 후작부인, 존 말코비치가 발몽 자작을 연기했고 미셸 파이퍼, 우마 서먼, 키아누 리브스까지 출연했습니다. (네. 그 키아누 리브스가 맞습니다. 존 윅이 되기 한참 전의 꽃미남 리브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당시 키아누는 꽃미남 전문 배우였습니다
그당시 키아누는 꽃미남 전문 배우였습니다

이 영화의 힘은 결국 배우입니다.

글렌 클로즈와 존 말코비치가 서로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 게임이 시작됩니다. 특히 글렌 클로즈는 대단합니다.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습니다.

그냥 상대를 바라보고 몇 마디 합니다.

그런데, 그 몇 마디로 이미 이 사람이 방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웃고 있는데 친절해 보이지 않고, 양보하는 것 같은데 조금 지나고 보면 상대가 메르테유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성, 오만, 욕망, 질투, 분노가 한 얼굴에 같이 있습니다.

《위험한 관계》라는 작품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아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화려한 의상도 중요하고 미술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위험한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을 때 얼마나 긴장감이 생기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1988년 위험한 관계, 어후 다들 독해 보여...
1988년 위험한 관계, 어후 다들 독해 보여...

바로 다음 해인 1989년에는 밀로시 포먼도 같은 원작을 《발몽》으로 영화화합니다. 1년 사이 같은 원작으로 대형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온 겁니다. 당시 영화계에서도 이 원작이 얼마나 맛있는 재료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99년, 프랑스 귀족들이 미국 고등학생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가 등장합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Cruel Intentions)》.

1999년 로저 컴블 감독은 가발과 드레스와 프랑스 귀족들을 몽땅 치워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뉴욕의 부유한 고등학생들을 집어넣습니다. 발몽은 라이언 필립이 연기한 세바스찬이 되고, 메르테유는 세라 미셸 겔러가 연기한 캐서린이 됩니다. 순결한 투르벨 부인의 자리는 리즈 위더스푼의 아네트가 대신합니다.

놀랍게도 별 위화감이 없습니다.
등장인물에게 교복을 입혀도 욕망까지 어려지지는 않습니다. 
아니, 사실 고등학생들의 욕망은 말입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다들 기억하시죠?

사춘기의 성욕은 우주를 씹어먹을 정도거든요.

그러니 18세기 프랑스 귀족들의 성적 음모를 미국 고등학교에 집어넣은 게 생각보다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결정적인 인물은 캐서린입니다.

세라 미셸 겔러는 글렌 클로즈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메르테유를 만들어냅니다. 글렌 클로즈가 지성과 위압감으로 상대를 지배한다면, 세라 미셸 겔러는 젊음과 아름다움, 성적 매력과 자신감을 권력으로 사용합니다.

지금 봐도 주인공들 매력철철
지금 봐도 주인공들 매력철철

그 시절 세라 미셸 겔러에게는 정말 묘한 포스가 있었습니다. 예쁘고 인기 많은 학교의 퀸카인데, 가까이 가면 인생 조질 것 같은 느낌. 한마디로 팜므파탈입니다. 그 매력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웃고 있는데 무섭습니다. 그래서 캐서린이 세바스찬에게 황당한 게임을 제안해도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얘라면 저러고도 남겠는데?”

관객이 바로 납득합니다. 저는 지금 다시 봐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 하이틴 영화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야하고 자극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원작의 구조를 정말 영리하게 현대화했습니다.

18세기 귀족에게 혈통과 사교계의 평판이 권력이었다면 1999년 맨해튼 부유층 10대에게는 돈과 외모, 학교 안에서의 평판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권력입니다. 배경만 바뀌었을 뿐 계급은 그대로입니다.

게임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고전을 현대화했다기보다 고전 안에 원래 들어 있던 현대성을 꺼낸 영화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음악. 지금도 저는 The Verve의 〈Bitter Sweet Symphony〉를 들으면 이 영화가 생각납니다. 영화 마지막, 모든 것이 무너진 뒤 음악이 시작되면 그냥 끝납니다. 영화는 끝났는데 감정은 음악에 달라붙어서 한참 더 갑니다.

좋은 영화음악이 하는 일이 이런 거겠죠.

 


2003년, 프랑스 귀족이 조선 양반이 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위험한 게임을 가져옵니다.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입니다. 배용준이 조원, 이미숙이 조씨부인, 전도연이 숙부인을 연기했습니다. 처음 들으면 꽤 이상한 조합입니다.

프랑스 혁명 직전 귀족사회를 풍자한 소설을 조선으로 가져온다?

그런데 막상 붙여놓으니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오히려 조선이라는 배경 때문에 원작의 욕망게임은 더 잔인해졌습니다. 정절을 목숨처럼 요구했던 사회에서 정숙한 여인을 유혹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과 잠자리를 갖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의 사회적 존재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이 강했습니다.
이미숙의 조씨부인은 정말 절묘합니다.

말투는 차분하고 행동은 우아한데 그 안에서 욕망과 질투와 지성과 잔혹함이 같이 끓습니다.

조선 사대부가 여인의 품위 자체가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배용준의 조원도 당시 대중이 알고 있던 부드럽고 반듯한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었고, 전도연의 숙부인은 단순히 유혹당하는 여자가 아니라 평생 지켜온 질서와 처음 느끼는 욕망 사이에서 무너지는 사람을 만들어냈습니다.

세 사람에게 각기 다른 종류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사를 듣고 있으면 사람이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납니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상대의 표정을 보고 계산하고, 어떤 말은 삼키고 어떤 말은 일부러 던집니다.

그리고 영화가 남긴 말이 하나 있었죠.

“…통하였느냐?”

네. 그럼요. 심쿵. 이때는 제대로 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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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이번에는 상하이로 갑니다


한국과 《위험한 관계》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012년에는 허진호 감독이 이 이야기를 다시 만듭니다. 이번에는 조선도 아닙니다. 1930년대 상하이입니다. 이 영화가 바로 장동건, 장쯔이, 장백지가 출연한 《위험한 관계》입니다.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가 화려하고 퇴폐적인 1930년대 상하이 상류사회로 바뀝니다.

프랑스에서 현대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 고등학교로 갔다가 조선에 갔다가 이번엔 상하이입니다.

발몽은 정말 여권에 도장 찍을 틈이 없이 전세계를 여행합니다. ㅋㅋ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위험한 관계》의 핵심은 베르사유 궁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급이 있고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하고 위험한 인간들이 존재하는 사회라면 어디에서든 성립합니다.

좋은 원작이라는 게 이런 겁니다.

뼈대가 워낙 튼튼해서 옷을 몇 번 갈아입혀도 태가 죽지 않습니다.

장백지와 장쯔이가 나온다고요 여러분!!
장백지와 장쯔이가 나온다고요 여러분!!

2026년, 다시 《스캔들》


23년이 지나 넷플릭스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손예진이 조씨부인, 지창욱이 조원, 나나가 희연을 맡았습니다. 총 8부작입니다. 연출은 정지우 감독입니다. 저는 《해피엔드》부터 《은교》, 《유열의 음악앨범》, 《썸바디》까지 정지우 감독이 사람 사이의 미묘한 욕망과 관계를 들여다보는 방식을 꽤 좋아합니다.

그래서 더 기대했습니다. 정지우 감독과 《위험한 관계》라니. 소재만 생각하면 너무 잘 맞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스캔들》을 보면서 이상할 정도로 인물들의 욕망이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화면 예쁘고 좋습니다. 의상도 화려하고 공간도 아름답습니다. 카메라와 조명도 당연히 23년 전 영화보다 훨씬 세련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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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화질은 4K가 됐는데
욕망은 이상하게 저해상도였습니다.

하지만 잠깐!! 

제가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을 싫어한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노출 수위나 야함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어느 조연의 예상하지 못했던 과감한 장면이 나왔을 때는, 음…. 이 부분은 제작진의 판단을 폭풍와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

누구인지는 굳이 쓰지 않겠습니다.
직접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좋더군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화면도 좋고,
볼거리도 있고, 야해야 할 때는 제법 야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많이 보여주는데 더 빈틈이 보였고 허전하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미슐랭 3스타 맛집에서 고품격 코스 요리를 먹었는데 퓨전 음식의 재료들이 서로 겉돌고 감칠맛은 부족한 느낌이랄까요? 메인 디쉬도 사실 특별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충분히 맛볼 수 있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러니까. 비싼 요리 먹고, 집에 와서 고추가루와 파 듬뿍넣고 계란 하나 탁 풀어서 라면을 한그릇 먹어야 하는 그런 느낌 아시죠? 그래서 저는 넷플릭스 《스캔들》  을 보고 나서 다른 걸 보고 충족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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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클로즈, 세라 미셸 겔러, 이미숙, 그리고 손예진


여기서 다시 '메르테유'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글렌 클로즈 → 세라 미셸 겔러 → 이미숙 → 손예진

시대도 다르고 작품의 분위기도 다르지만 모두 같은 캐릭터의 피를 물려받은 배우들입니다. 그리고 이 네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이번 《스캔들》에서 제가 무엇을 아쉬워했는지가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글렌 클로즈의 메르테유는 지성으로 압도합니다.
세라 미셸 겔러의 캐서린은 젊음과 성적 매력, 자신감으로 압도합니다.
이미숙의 조씨부인은 품위와 연륜, 감춰진 욕망으로 압도합니다.

셋은 같은 배역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위험합니다. 저 여자 가까이 가면 인생이 편하지 않겠다는 걸 관객이 바로 압니다.

그런데도 끌립니다.
바로 그 모순이 메르테유의 매력입니다.

저는 이런 영화에서 배우의 포스가 단순히 배우가 멋있어 보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배우의 매력 자체가 스토리텔링입니다.

왜 발몽이 저 여자와 게임을 하는지, 왜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에게 끌려가는지, 왜 저 여자가 사람의 감정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지. 배우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상당 부분을 설명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배우의 매력은 이 이야기에서 일종의 게임 속 치트키입니다. 대사가 조금 부족해도 배우가 메워버리고,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객이 납득합니다. 

Dangerous Liaisons, TV Series, 2022
Dangerous Liaisons, TV Series, 2022

그런 면에서 손예진은 조금 복잡합니다.

먼저 저는 이번 드라마에서 손예진이 가장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연기도 좋고 배역에도 잘 어울립니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수 없는 여성의 답답함과 분노, 질투와 흔들리는 감정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손예진이 못해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역대 이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과 나란히 놓으면 저는 조금 약하게 느껴졌습니다. 글렌 클로즈에게 있었던 서늘한 위압감, 세라 미셸 겔러에게 있었던 독기 어린 매력, 이미숙에게 있었던 우아하면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감. 그것과 비교하면 이번 손예진이 맡은 조씨부인은 위험한 여자라기보다 상처받고 억눌린 여자로 먼저 보입니다. 존재감이 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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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차이가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연기력보다 각본과 연출이 조씨부인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메르테유 계열의 인물은 관객이 이해하기 전에 먼저 압도돼야 합니다.

“저 여자가 왜 저렇게 됐을까?”보다 먼저,
“와, 씨. 저 여자 위험하다.” 가 와야 합니다.

그 뒤에 그녀의 상처와 욕망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번 작품은 그 순서가 조금 반대로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나나의 첫 등장신이나 드라마 초반에 보여주던 초췌한 모습 속에서 '어? 저여자 위험하다'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손예진은 아주 잘하는데, 조씨부인의 포스는 이전보다 약합니다.

만약 제가 감독이었으면 손예진을 빼고 나나를 조씨부인으로 놓고 더 어린 배우나 비슷한 나이의 배우에게 안희연을 맡겼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나나와 손예진의 배역을 바꿨으면 훨씬 재밌었을 것 같습니다. 나나의 화장이나 표정,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조씨부인에 더 잘 맞았습니다. 정절과 명예를 지키려 하는 청상과부가 그렇게 치명적이면... 흠... 

나나가 조씨부인 했어야...
나나가 조씨부인 했어야...

저는 그 작은 차이가 작품 전체의 흡입력에도 생각보다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그러니 못만들었다기 보다 게임의 룰을 잘못 설정하고 캐릭터 배분을 잘못한 것에 가까운 겁니다. 그래서 아쉽구요.

 


대사가 있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이번 《스캔들》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배우들의 연기 그 자체라기보다 '연기의 방향'입니다. 배우들이 연기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손예진도, 지창욱도, 나나도 연기를 꽤 잘하는 배우들입니다. 아니 각자 너무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대사와 인물이 따로 움직이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사극의 호흡도 아니고 현대극의 호흡도 아닙니다. 현대적인 사극을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사극 말투를 의도적으로 피한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현대극처럼 자연스럽게 붙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물이 말한다기보다 배우가 이 대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먼저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한복은 이쁘더군요...
한복은 이쁘더군요...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큽니다. 

《위험한 관계》는 대사가 살아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말은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닙니다. 

유혹이고,
함정이고,
거짓말이고,
공격입니다.

말 그대로 말로 칼과 방패를 들고 싸우며, 진법과 전략을 세우는 게임입니다. 한마디를 던졌을 때 상대의 얼굴이 변해야 하고, 그 반응을 확인한 사람이 다음 말을 바꿔야 합니다. 그 작은 움직임들이 쌓이면서 욕망이 보이고 권력관계가 바뀝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는 대사는 많은데 대사가 상대를 찌르는 느낌이 약합니다. 욕망에 관한 말을 하는데 욕망은 잘 보이지 않고, 노출은 있는데 에로틱한 긴장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유와 해학과 풍류가 느껴지는 것도 아닙니다.

위험한 관계인데,

생각보다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다.


2시간을 8시간으로 늘린다고...


손예진의 아역으로 나왔지만 더 매력있었던 신소현 배우
손예진의 아역으로 나왔지만 더 매력있었던 신소현 배우

시간을 늘린다고 이야기가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003년 《스캔들》은 약 두 시간입니다.
이번 작품은 8부작입니다.

당연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조씨부인의 삶을 더 보여줄 수도 있고, 조원이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도 있고, 희연에게 더 많은 시간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위험한 관계》는 묘하게도 압축될수록 독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게임을 시작하고, 목표를 정하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진심이 끼어들고 게임의 규칙이 무너집니다. 스피디하고 빨라야 하며, 욕망의 기관차에 올라타고, 심중을 나중에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게임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자기 게임에 잡아먹혀야 하고요. 아주 단순하고 잔인한 구조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설명을 계속 붙인다고 반드시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시간을 8시간으로 늘렸으니 더 깊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깊어진 것보다 체류시간이 늘어나서 지루해진 쪽에 가깝습니다.

독주에 물을 계속 붓는다고
더 좋은 술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번 《스캔들》은 인물에게 훨씬 많은 시간을 줬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간이 긴장을 희석시킨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다양한 조연인물들의 서사로 매꾸려 했지만... 글쎄요. 몇몇 조연은 정말 재밌는 캐릭터였지만, 나머지 캐릭터들은 억지로 시간을 늘리기 위해 넣은 것 같았습니다. 

굳이 8부작일 필요도 없었고,
그다지 8부작의 장정도 못살린 겁니다.

 


정지우 감독에게 잘 어울릴 줄 알았는데


그래서 저는 더 아쉬웠습니다.

정지우 감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균열을 잘 잡는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방식, 가까워지는 거리, 침묵의 길이 같은 것으로 보여주는 데 강점이 있는 감독입니다.

그런 감독이 《위험한 관계》를 만난다고 하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인물보다 스타일이 먼저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화면이 있고 멋진 의상이 있고 현대적으로 다듬어진 사극이 있는데, 그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할 인간들이 어딘가 박제되어 있습니다.

아주 비싼 옷인데 몸에는 맞지 않는 느낌입니다.

옷 자체는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어울릴 옷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에게 이번 《스캔들》이 딱 그랬습니다.

정지우 감독님은 현대물에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은 왜 아직도 통할까


그래서 오히려 1999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벌써 27년 전 영화입니다. 휴대전화도, 패션도, 음악도 지금 보면 분명 시대가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다시 봐도 재밌습니다. 

왜일까요?

아마 시대를 현대적으로 바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정확히 이해하고 바꿨기 때문일 겁니다. 프랑스 귀족을 미국 고등학생으로 바꾸면서도 원작의 독기를 버리지 않았고, 2003년 《스캔들》은 프랑스를 조선으로 보내면서 오히려 원작의 금기와 위선을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시 봐도 재밌더군요.

좋은 각색은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원작에서 무엇이 죽으면 안 되는지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위험한 관계》에서 죽으면 안 되는 것은 프랑스도 아니고 18세기도 아니고 가발도 한복도 아닙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 두 사람이 사랑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결국 자신들이 만든 게임 때문에 파괴되는 아이러니. 사람의 욕망을 먼저 읽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지적인 잔혹함. 그리고 말 한마디가 칼보다 위험했던 관계.

바로 그것입니다.


원작과 똑같다고 원작에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각색에는 이상한 역설이 있습니다. 

원작과 똑같이 만들수록 원작에서 멀어질 수도 있고,
원작을 과감하게 고칠수록 오히려 원작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1999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미국 고등학생입니다.
2003년 《스캔들》은 아예 조선으로 보내버렸습니다.
2012년 허진호 감독은 상하이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위험한 관계》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발도, 한복도, 침대도 아니었던 겁니다. 누가 누구를 욕망하고, 누가 그 욕망을 먼저 알아차리며, 누가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는가. 그리고 그 게임을 벌이는 사람들이 정말 매력적이고 위험하게 보이는가.

결국 《위험한 관계》는 이것 하나만 제대로 통하면 됩니다.

 

  Dangerous Liaisons, George Barbier, 1934  
  Dangerous Liaisons, George Barbier, 1934  

244년이 지나도 욕망은 늙지 않습니다


1782년 라클로의 원작 소설
1959년 로제 바딤의 영화
1988년 스티븐 프리어스의 《위험한 관계》
1989년 밀로시 포먼의 《발몽》
1999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2003년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2012년 허진호의 《위험한 관계》
그리고 2026년 넷플릭스 《스캔들》

244년 동안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를 계속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위험한 관계》가 얼마나 강력한 원작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귀족을 고등학생으로 바꾸고, 프랑스 후작부인을 조선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바꾸고, 파리에서 뉴욕으로, 조선으로, 상하이로 보내도 이야기가 살아남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술은 발전해도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별로 발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투하고, 탐내고, 소유하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고, 먼저 상처받기 싫어서 상대를 먼저 상처 입히는 인간의 방식은 1782년이나 2026년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관계》는 앞으로도 또 만들어질 겁니다. 다만 다음번에는 화질이 더 좋아지는 것보다, 세트가 더 커지는 것보다, 회차가 더 길어지는 것보다, 사람의 욕망이 다시 살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첨부 이미지

2003년 《스캔들》이 물었습니다.

“…통하였느냐?”

23년이 지나 같은 질문을 이번 넷플릭스 《스캔들》에 돌려주고 싶습니다.

제게 묻는다면, 이번에는 아쉽게도

통하지 못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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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의 수많은 버전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저는 아무래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과 2003년 《스캔들》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또 〈Bitter Sweet Symphony〉가 듣고 싶어지네요. 

첨부 이미지

이번주는244년동안남녀가서로꼬시는동안솔로로지내는김광혁이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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