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2021.03.24 | 조회 5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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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레코드점에 가까스로 들어섰지만 남음 시간이 약 30분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다소 부지런을 떨 필요가 있었다. 왼쪽 주머니에서 버스 티켓과 시간까지 확인하곤 녀석의 무사함과 나의 안전함을 주머니 속으로 동시에 밀어 넣었다. 가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에서 반대편 대각선으로 스치듯 서성거렸다. 벽마다 알록달록 저마다의 색채를 빛내며 들쭉날쭉 옆구리를 쑥 내민 LP들의 일정한 배열들이 나타났다. 레코드점 주인이 만들어내는 신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간혹 들렸지만 낮게 깔리던 opus의 flying high를 방해하진 못했다.

매대 위에서 김현식의 앨범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추억 만들기’, 한국 사람’, ‘나의 하루는’ 특히 ‘추억 만들기’라는 제목에 끌렸다. 난 머나먼 그곳에서 어떤 추억을 쌓아 왔을까. 그것은 추억으로 충분히 기념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수동태적인 생각들, 해결되지 않은 모순들이 정리되지 않고 턴테이블 위에서 회전하는 까만 LP처럼 입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김현식, 원인 모를 죽음, 원하지 않던 선택, 부정의 부정, 떠남, 방황, 미련, 이런 단어들이 극렬하게 집중을 방해했다. 그때 나는 모든 면에서 불안했고 내 의지가 아닌 것들에 해석당하는 삶이 불편했다. 왜 강원도여야 했을까, 원통, 그것도 모자라 철책선 너머까지 이동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인생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마치 도망자라도 된 듯이 나는 계속 너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사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원인이 나머지 인생을 지배할 거라는 사실, 네가 내 기억을 조금씩 떼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럼에도 나에게 떨어지는 선택을 거부하는 방법도 그렇다고 이미 지나쳐버린 과거를 구원하는 것도, 그것들을 극단적으로 지워버릴 방법조차 실행하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김현식처럼 몹쓸 병이라도 걸린다면 이런 꾸준한 방해세력들에게 안락을 되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어리석은 탓에 그런 결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서울로 떠나기 30분 전에 이 레코드점을 무의식적으로 찾은 것이다. 아마 그 결정을 보태게 한 것은 아바의 winner takes it all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떤 이해 못 할 움직임이 인간을 낯선 곳으로 인도하기도 하니까. 나는 나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위해, 가능하다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과오, 과거 따위들을 멜로디에 태워 멀리멀리 날려보내고 싶었기에 그 문을 슬며시 열게 된 것 아니었을까. 희미해지는 의식을 잠시라도 깨우기 위해. 하지만 이곳이 과연 내가 원하던 곳이었을까,라고 물으면, 나는 역시 그 질문에 그때도 지금도 불편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적어도 음악과 함께 있으면 나는 그동안의 모든 실패를 잊을 수 있었달까. 나의 불편함 들일랑 강물에 몰래 흘려보내야 하는, 마치 절대 개봉해서는 안 될 비밀처럼, 음악에 함께 봉인해서 보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내가 음악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내 스스로 해석하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단 4분 30초 일지라도 온전하게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수단.

 

어떤 존재든 자신만의 지분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음악은 나의 이러한 오랜 편협함, 고정된 인식을 무너뜨려줄까.

그래서, 나의 불안정함, 불편함, 무의미한 관념의 반복조차

음악이 거주하는 경계 내에서라면 안전하게 각인될까.

나의 지난 모든 낡은 유효함조차 이곳이라면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을까.

음악이 그만의 지분만으로 충분히 살아가듯,

나도 아슬아슬하겠지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버티는 건 가능할까.

음악 속에서 나는 언제는 너를 만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까.

 

브라이언 아담스의 ‘Waking Up the Neighbours’ 앨범을 꽉 잡았다. 어쩌면 나는 더 단순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락의 맑은 정신, 시원함, 순수한 영혼, 강렬한 에너지에 끌렸나 보다. "아저씨 앨범 지금 들어볼 수 있나요?” “어, 듣는 건 언제든 가능한데, 버스 타야 되는 거 아냐?” 나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티켓 따위야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네 번째 트랙으로 틀어주세요. Thought I'd Died And Gone To Heaven. 이곡으로요. 아저씨 그런데 이곳은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제가 살아있는 건 분명한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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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기

    0
    about 3 years 전

    버스표대신 롹음악을 선택하셨군요!! 롹에 빠지셨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공심님께서 제가 공심재에 첨 왔을때 피아노음악과 재즈 음악을 띄워주셔서겠지요? 왠지 공심님은 피아노연주와 더 어울리는^^~ 음악도 책도 편식하지 않고 듣는게 좋은것같아요 오늘은 올려주신 음악을 듣겠습니다^^~ 좋은 글과 음악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 veca

    0
    about 3 years 전

    까아악~~~김현식~브라이언 아담스~겁나 좋아하는ᆢ동영상보니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왠지 아련한 과거로 데려가는 듯 합니다.김현식 그 앨범 선물받고 닳도록 들었던 기억도 나네요. 모르고 싶지만 절로 아는 척하고 후회중입니다만ᆢ일간공심도 점점 더 좋아지는 참인데 아쉽습니다1.2.3.4.5.6.7.8.9.......

    ㄴ 답글 (1)
  • 일과삶

    0
    about 3 years 전

    소설일까요? 실화일까요?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ㅎㅎ 덕분에 음악감상 잘 했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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