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것의 경계를 구획하는 일

2021.06.14 | 조회 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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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오래도록 집이 없는 채로 살아왔다.(여기서 구체적인 기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제 나이가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이해 바랍니다. 신비주의 전략입니다.) 태어나 결혼한 후 한동안 계속 다른 사람이 소유한 집에 얹혀 살아왔다는 얘기다. 엄밀히 따진다면 집은 분명 어떤 형태를 이럭저럭 갖추고 있었지만 사실상 형체가 없기도 했다. 그 집이 내 소유이거나 우리 가족의 소유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 말은 모순적이지만 있다, 없다에 선을 그을 수 없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돌아갈 곳은 있었지만, 그 공간에 정을 두지 못했다는 것, 그 말은 늘 다른 곳, 언젠가 내 집이 될 어떤 공간을 그리워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그런 생각에 늘 가득 찼으니 집에 가는 게 좋을 리 없었다. 그 집에서 공부하는 것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집에서 긍정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으니까, 집에 가기 싫어서 때로 버스로 30분 이상 소요될 길을 일부러 걸어 다닌 적도 많았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응암동에서 갈현동 버스 종점까지, 낯선 동네가 마치 내가 전에 살던 곳으로 느껴질 정도로 멀리멀리 돌아서, 마치 개척자라도 된 듯이 여기저기를 누비며 다닌 것이다. 말하자면 고의 방황 같을 것을.

가난이란 것은 영원히 내 뒤를 따라다니며 이 서울이라는 동네에서 단 한 평의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 나는 집 없는 자의 울분을 다음 세대까지 물려주어야만 할 것 같은 공포감에 빠지다, 그런 석연치 않은 분위기를 떨쳐버리려 애써 공상에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필 콜린스, 브라이언 아담스, 그리고 리처드 막스와 같은 마치 돌아갈 곳이 분명하게 마련된 사람의 음악으로 도망을 선택한 것이다.

집은 사춘기 시절의 어떤 일정한 흐름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자존심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내 일상에서 늘 흐름이든 질서든 그것이 무너지는 걸 목격해야 헸으니 나는 자존감이 부재된 상태에서 줄곧 살아야 했다. 나는 그 가난이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부각될 것 같아서 그 누구도 집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마치 나는 집 없는 유령처럼 학교와 집을 오고 갔지만, 그 누구도 내 집을 본 적이 없는, 다소 기이하고 괴이한 존재로 내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 물론 그 선택은 내 외부이며 내부이자 나를 둘러싼 아우라 역할을 감당해내어서, 가난이라는 멍에를 쉽게 감추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의 본질이자 정체성, 말하자면 집이 있으나 그것이 나를 떳떳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어떤 한계성, 다른 모든 것은 허물어뜨려도 집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전제조건은 확고했으니, 나는 지독히도 집이라는 프레임에 집착하며 살아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집 없이 오래도록 살아오다 결혼 후 만 7년 만에 내 집을 소유하게 됐다. 서울 금호동,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썩 괜찮은 아파트였다. 당시 그 집의 매매가격이 2억 5천이었으나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정확히 1억이 모자랐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 특히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부모님은 그럴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은행에서 1억을 대출받아 내 집 마련의 꿈을 최초로, 그러니까 7년 동안 차곡차곡 모아놓은 돈과 은행 빚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집의 너비는 물론 중요하지 않았다. 이 넓고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비좁은 서울 땅덩어리 위에 내 집을 갖게 됐다는 의미가 더 중요했으니까. 무리한 대출은 혹시나 이 집이 은행권으로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기긴 했지만, 하루빨리 빚을 갚아서 온전한 내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을 다지게 했으니까, 그 이후 내가 더 열심히 산 것의 마중물이 되었다고 할까? 아무튼 나는 비교적 근면하게 단 한 번도 백수인 적이 없이 직장 생활을 유지했다.

그 집은 형태를 바꿔서 서울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다른 모습으로 모양을 바꿔나갔다. 집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됐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변하는 만큼 집도 같이 변해갈까. 집 없이 살아온 세월을 잊게 할 만큼, 집은 나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전달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될까? 집에 집착하며 살아왔지만, 막상 집이 생기자 집은 본래의 의미를 떠나서, 그러니까 과거의 울분, 자존심의 하락조차 망각하고 어느새 부의 상징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아닐까. 집은 그대로지만 내 욕심은 계속 부풀어져지다, 그만 풍선처럼 어느 순간 터지고 말지 않을까.

나는 사춘기 시절, 분명히 내 집을 부끄러워했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혐오했을지도.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겉으로는 집이 있는 멀쩡한 다른 아이들처럼 외관을 꾸미려 애썼다. 그러니까 내 삶을 이상한 자존심으로 덧칠해버린 것이다. 그 두께가 1mm씩 자라날 때마다, 나는 더 많은 비밀을 속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야 했으며, 그만큼 나는 온갖 부끄러움을 태연한 것으로 포장하며 살아야 했으니, 어쩌면 나는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집 걱정이 없어서, 서울 한복판에 그것도 한강 남쪽 어딘가에 내 집 한 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를 가리던 무겁고 때묻은 외피를 걷어치우게 될까. 하지만 나는 또 누군가의 집과 내 집을 비교하며 살게 될 것 같다. 더 나은 환경, 더 안전한 동네에서 살 꿈을 꾸며, 또 다른 자존심을 온몸에 바르며 살게 될 것 같다. 그게 나인 걸 어떡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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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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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효정

    0
    almost 3 years 전

    이렇게 마음을 꽁꽁 숨기고 사셨던 적도 있군요? ㅎㅎ 그런데 이토록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방법을 획득하시게 된 점 왠지 축하드리고 싶고 앞으로도 응원드리고 싶어요 ^^

    ㄴ 답글 (1)
  • 드림그릿

    0
    almost 3 years 전

    집이 주는 안정감, 그집이 내집이라 이사할걱정이 없다면..그런데 집을 갖고나면 더좋은집이 들어오니..그게 나인걸 어떡하라..는 그말씀이 들어오네요..

    ㄴ 답글 (1)
  • 옥돌여행

    0
    almost 3 years 전

    집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열심히 살아온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겠네요. 성취 축하드립니다.^^

    ㄴ 답글 (1)
  • 일과삶

    0
    almost 3 years 전

    서울 한복판 강남 어딘가에 내집이 있는 지금의 모습을 과거의 공심님이 본다면 정말 자랑스러울 듯 합니다.

    ㄴ 답글 (1)
  • Sunflower 🌻

    0
    almost 3 years 전

    금호동에도 사셨나요? 한강 바라보이는 곳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충. 와! 전 옥수동에서 중1때부터 결혼 전까지 살았어요. 거기 이제 넘 넘 비싸졌어요. 공심님~ 저도 집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마음입니다..13년 전 계약서를 썼더라면... 뭐 이런 생각도 하구요~ 지금은 이 집에서 안정적으로 두 아이 모두 건강하게 열심히 키워낸게 뿌듯합니다. 앞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사시는.곳도 가격이 넘 넘 올랐지요. 그 때도 청약이 안 되었는데 운이 정말 좋으십니다. 노력과 행운! 함께.하시길요~

    ㄴ 답글 (1)
  • 망망

    0
    almos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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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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