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아래로 깊이 내려가는 일

2021.06.30 | 조회 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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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커다란 원반을 던진다. 규칙적이지도 불규칙적이지도 않은 타원이 수면 아래에서 제 몸뚱이를 회전하며 자취를 그린다. 그 원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나선형의 은하단처럼 주변에 영향을 미치며 무엇이든 거세게 때려버린다. 물살은 물보라를 만들고 물보라는 파도를 일렁이게 하고 일렁임은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나락 속으로 구원은 없다며 스스로를 거듭 추락시킨다. 그것은 순응하지만 가끔 격하게 거스른다. 모든 것을 무찌를 태세로.

검은 물결 위에 더 검게 그을린 무엇, 어쩌면 검은 핏물일지도 모르는 그것들이 위에서 아래로 때론 반대로 퍼부어진다. 거칠게 숨도 쉬지 않고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에너지가 계속적으로 누적된다. 그것은 바닥이 없는 절벽이다. 절벽은 집채만 하다. 아니 집채보다 더 높은, 말하자면 도시에 우거진 빌딩들이다. 빌딩들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흩어지며 나눠지고 곧 부서지지만 어느새 군집을 이룬다. 죽은 것은 살아나고 산 것은 결국 죽는다.

바다, 죽지 않고도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바다, 저만치 높은 곳, 즉 망루 위에서 커다랗지만 요염하게 생긴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요동의 물결을 일으킨다. 끝이 없는 꼬리를 뒤흔들며 바닥을 때리면 폭풍의 세력들이 새롭게 태어난다. 검은 파동, 겹겹이 쌓인 파도의 면면들에서 혼란이 깨어난다. 질서와 무질서, 규합과 해체, 이동과 멈춤이 불연속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에서 생겨나며 무엇이든 때리고 밀어버린다.

내 집은 그 바다 중심에 붕 떠 있다. 수면 위에 둥둥 떠다니거나 위태로운 나선형의 선 끝에 걸쳐있다. 선은 팽팽하지도 집을 지탱할 만큼 튼튼하지도 않다. 그러니 요새가 아니지만 무너진 요새처럼 힘을 잃고 떠내려간다. 실이 툭 끊기고 파도에 삼켜지고 먹혀버린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집은 스스로 회전운동을 시작한다. 힘을 비축하려고 자전하며 발악한다. 하지만 끌려간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어둠 속으로 끝도 없이 밀려난다.

“이게 내가 요즘 꾸는 꿈이야. 이런 꿈을 계속 반복해서 꿔. 전혀 이유를 모르겠어.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바다에 있어. 바다 정중앙에 있는 거지. 거기가 어떻게 바다 가운데인지 아냐고? 그건 집채만 한, 아니 내 집보다 훨씬 큰 파도의 규모를 보면 짐작할 수 있어. 연안에서는 그런 파도를 구경하기 힘드니까. 아무튼 나는, 아니 내 집은 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거야. 끝도 없이 파도는 치밀어 오르지. 무서운 파도를 혹시 본 적 있어? 롯데 월드 타워보다 더 높은 파도 말이야.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무서운 파도야. 그런 건 바다 사나이들도 목격하지 못했을 거야. 평생 그런 파도를 보고 싶어서 선장이 되려는 안달 난 사람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기 전까지 그런 파도와 맞서고 싶지는 않을 거야.”

“그래, 네가 꿨다는 그 꿈 참 희한하다. 왜 그런 꿈을 계속 꾸는 걸까 나도 궁금해지네. 그 꿈에서 네 집이 나온다는 거지. 태평양인지 대서양인지 알 수 없지만 롯데 타워보다 더 높은 파도가 친다는 얘기고. 그래서 네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야? 계속 이야기해 줘봐.”

“계속 끊어진 필름처럼 같은 장면만 반복되는 거야. 마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처럼, 그 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구간만 재생했어. 그러니까 나는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대양 한가운데에 버려진 신세고 내 집은 그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저쪽 끝에선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몸체를 흔들며 파도를 계속 생산해내고 있고, 내 집은 어떤 힘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부력 덕분에 계속 떠 있을 수 있었어. 아슬아슬 곧 침몰하는 난파선처럼 흔들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더라. 난 그게 참 기묘했어. 이유를 알 수 없었지. 어쩌면 나는 그 광경을 구경하면서 차라리 쓸데없는 집이란 건 침몰해버려 라고 말했던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랐지만... 도대체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어?”

A는 내 이야기를 물론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꿈에 어떤 개연성을 대입시켜서 적당한 원인과 결과를 해석해 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실과 꿈은 서로 격리되어 있다.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A는 그런 것을 해석할 꿈 전문가도 아니며 어떤 미래가 예견된다고 나에게 경고 메시지 같은 걸 전달해 줘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안다고 해도 그런 걸 이야기해 주는 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리라.

녀석과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다. 그 위엔 사각형의 얼음조각들이 무심하게 둥둥 떠 있다. 어떤 녀석은 수면 위에 얼굴을 드러내놓고 어떤 녀석은 수면 아래 깊은 곳에 기다리고 있다. 어떤 잠재된 기운, 힘이 수면 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수면 위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투명한 유리컵을 흔들어봤다. 그리고 수면에 꽂힌 스트로크를 좌에서 우로, 또 우에서 좌로, 혹은 아래위로 적당하게 타원을 그려가며 인위적인 기세를 만들어봤다. 얼음이든 혹은 투명 유리컵에 잠든 작은 파도라 할 것도 못 되는 액체는 자신의 존재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것을 관망하는 나의 존재만이 관찰의 중심에 있다. 나는 구경하며 그들의 흥망성쇠를 잠시 논할 뿐이다. 나는 그런 신격화된 지위를 얻고 인간의 기본적인 품격보다 한 단계 상승했을 거라고 어떤 착각에 빠진다. 더 강하게 투명 컵을 흔들어본다. 액체가 유리컵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한다. 나는 그것을 조절하며 잠재우려 한다. 허무하게 불식시켜 버린다. 분노를 아래로 떨어뜨린다. 기운은 잦아들고 평온을 되찾아 간다.

“그런 거 혹시 느낀 적 있어? 어릴 적 책받침하고 자석 두개로 학교에서 장난치곤 했잖아. 책받침 밑에는 아주 커다랗고 강한 자석을 불이고 반대편 위에는 작은 자석을 올려놓는 거지. 자석과 자석 사이에는 책받침이라는 경계가 세워져 있어. 자석과 자석은 서로의 존재든 가능성이든 어떤 정보도 주고받지 못해. 서로를 모르는 거지. 다만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사실은 얼핏 이해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래쪽에서 자신의 위력을 파악하지 못하는 아주 강한 녀석이 윗동네에 사는 녀석을 시종일관 흔들고 이동시키지. 왼쪽으로 가면 윗동네의 녀석도 왼쪽으로, 아랫동네 녀석이 오른쪽으로 가면 윗동네도 오른쪽으로 이동하지. 그러니까 녀석의 행동반경은 아랫동네의 작정에 달려 있는 거야. 둘은 짝꿍?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원자 운동을 설명할지도. 어쨌든 그 운명은 말하자면 서로 보이지 않는 선 같은 것으로 붙들려 있는 거지. 그런데 어느 순간 아랫동네의 녀석이 힘을 잃게 돼. 알 수 없지만 나이를 먹는 것처럼 변해가는 거야. 그래서 그 든든했던 녀석이 밑으로 툭 떨어져 버리는 거지. 대양 밑으로 마리아나 해구 같은 곳으로 깊숙이 처박혀 버리는 거야. 그러면 윗동네의 보잘것없는 녀석은 갈 곳이 사라져. 하지만 녀석은 자신의 처지를 몰라. 영문을 모르는 거지. 대체 어떤 일이 밑에서 일어나는 거야 그런 생각도 할 수 없어. 어느 날 원인 모를 현상 때문에 세계가, 녀석이 지탱하던 든든함이 기울어져. 자전축이 흔들리든 우주의 블랙홀들이 갑자기 지구에 간섭하는 것이든 그런 기묘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잖아. 그러면 녀석은 끝도 없이 미끄려져.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고 가속이 붙고 더 맹렬하게 밑으로 밑으로 꺼져버리는 거지. 처박혀버리는 거야, 외딴곳으로. 힘을 내려고 노력해도 너무 늦었어. 결국 언젠가 끝에 다다르게 돼. 네가 꿈속에서 본, 바로 대양에서 만들어진 그 절벽 끝이 향하는 곳이지. 절벽이 나타나고 우습게도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거지, 어딘지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영원한 무의 세계로 추락해버리는 거야. 그게 네 집이, 아니 어쩌면 네가 처할 운명이 아닐까?” 녀석이 말했다.

“그렇군.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 자석과 내 꿈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어”

“네 꿈 이야기를 더 해봐. 그러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래, 나는 늘 같은 꿈을 밤마다 꿨지. 어떤 날에 그 기억이 사라지기도 했어. 새벽에 눈을 뜨면 그날은 꿈을 꾸지 않은 모양이야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거야. 그런 날은 비교적 컨디션이 괜찮았거든. 그런데 찜찜한 구석도 있었어. 매일 마주치는 친근한 녀석과 이별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꿈이 잠시 멈춘 그날 이후 꿈은 조금씩 자신의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어.”

“음, 어떻게 바꿨는지 궁금하네”

“내가 대양 한가운데 언제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집 속에 있는 건 맞았는데, 기묘하게도 나는 꿈 바깥에 있었어. 꿈을 내가 통제할 수는 없는데, 그 꿈을 관찰자의 신분이 되어서 마치 영화를 감상하듯 어느 장소, 그러니까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해서 꿈을 구경하는 거야. 구경꾼이 되어서 그러니까 어쩌면 신변이 보장된 위치에서 그 장면을 감상하는 거지. 물론 집은 여전히 위태로웠어. 가망성이 전혀 없었어. 희망봉이란 건 애초에 없었지. 대양 한가운데에서 빌딩보다 더 큰 파도 앞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 언제 침몰할 것인가 기다리는 것뿐이지. 제아무리 용을 써도 그 운명은 정해진 대로 흘러갈 뿐일 테니까.”

“하지만 집은 침몰하지도 단 1밀리의 균열도 생겨나지 않았어. 놀라울 정도로 성했지. 적어도 외견상은 그랬어. 난 그걸 처음부터 계속 목격하고 있었으니까. 파도가 자신의 목구멍 속으로 내 집을 삼켜버리려고 기다란 혀로 그것을 휘어감았지만 용케도 잘 버텼어. 진짜 이상하지 않아? 그런 파도는 유조선도 항공모함도 견디지 못해. 그런데 그 작은 집이 버틴 거야. 살아나려고 애쓴 거지. 죽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어떤 희망이라도 피어나려는 걸까? 설마 아닐 거야. 그냥 운이 좋았던 거겠지? 집은 난파하듯 여기저기로 휩쓸려 다녔지만 거대한 자석이 아래쪽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마치 든든한 후원자가 응원해 주는 것처럼 가라앉지 않고 떠다녔어. 그래, 그 밑엔 분명 강한 자석 같은 게 있었던 거야. 분명해. 쓰러질 것 같아도, 희망이 없어 보여도 망하란 법은 없는 거야.”

“그 집이란 거 잘 모르겠지만 네가 오랫동안 움켜쥐고 있던 그 무엇이 아닐까? 집착 같은 거? 강박증 같은 거? 절대 버릴 수 없는 마지막 논리 같은 거 말이야. 혹은 오래도록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 그런 따위의 것들 말이야. 그런데 너는 그걸 침몰시키고 싶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런 위험 한가운데 그걸 내던져버린 거지. 너는 그런데 그 속에 있지 않아. 너는 방관자가 되어서 도망쳐서 그걸 제3자처럼 관망하는 거지. 이상한 지위를 얻은 마치 운명이 승격된 것처럼 신 행세를 하는 거야. 그리곤 그래도 슬쩍 개입이라는 요소를 더해주는 거지. 큰 적선을 하는 것처럼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며 말이야. 그래서 침몰이 안 된 거야. 내가 말한 그 자석이란 건 아마도 너 자신일 거야. 네가 놓치기 싫은 너만의 세력과 영향권이지. 태풍의 눈과 같다고 할까? 물론 그것은 네가 만든 작용이고 네가 시작한 사건이고 네가 종결지어야 할 최종 무대가 될 거야. 너는 그걸 언제까지 구경하고 있을 건데? 네가 곤고하게 쌓아놓은 제법 그럴싸하게 가꿔온 그 집을 어떻게 할 거냐고. 그렇게 위태롭게 휩쓸려 다니게 내버려 둘 거야? 구경꾼을 그만두라고. 정신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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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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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히

    0
    almost 3 years 전

    저도어젯밤꿈이 뒤숭숭한참에 뭔가 공감이 가는 소설이네요~ 꿈에서 꾸는 내용은 허무맹랑할지 몰라도 그 감정은 꼭 똑같이 드러나는일이 종종 있더라구요 어젯밤에 엄청 무서운꿈을 꿨는데 아직까진 별일이 없지만 약간 긴장이 됩니다 ㅋㅋ 공심님 오늘글도 잼났어요 얼른 에세이 내시는 날 오기를!

    ㄴ 답글
  • 권효정

    0
    almost 3 years 전

    요고 소설이에요? ㅎㅎ 요즘 뉴스레터 며칠 못봐서 소설인가 아닌가 헷갈리네요 ^^;;; 왠지 공심님 마음 속 다양한 인격중에 두 명이 만나 이야기하는 설정같기도 하고 ㅎㅎ 꿈에 대한 묘사나 두 인물간의 분위기 등등 흥미로웠어요 ~~~

    ㄴ 답글
  • Sunflower 🌻

    0
    almost 3 years 전

    작년에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서 공심님이 쓴 바닷가의 집과 비슷한 예술작품을 보았어요.VR 미디어 아트였는데 뱀이 파도를 일으키는 부분만 빼면 거의 비슷한걸요~ 거대힌 메타포로 글을 쓰샸네요. 프로이드도 보이고 융도 느껴집니다. 소설을 쓰시니 얼마나 좋으실까요~ 이렇게 내거 아닌 내거인양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으니~~부럽습니다! 그.집은 이제 어쩌시렵니까?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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