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과 살아지는 것들

2021.06.15 | 조회 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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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새벽 4:30 눈을 뜬다. 알림 소리에 맞춰서 반사적으로 0.1초 만에 눈이 먼저 깨어나는 것이다. 눈을 뜨면 눈꺼풀이 세상에서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하고 나머지 몸을 일으킨다. 몸을 왼쪽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리고 마치 프라이팬에서 굽는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꼰 이후 2초만 고민하고 에고든 육체든 일으켜 세운다.

하루의 시작, 어제와 오늘, 내일도 같을 것이다. 아이폰을 무선 충전기 위에 슬쩍 올려두곤 거울 앞에 서서 면도를 하고 매끈해진 피부를 손으로 스쳐 보곤 찬물로 샤워를 마친다.(비교적 짧다. 남자는 다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마지막 의식, 체중계에 올라 오늘 아침이 전하는 삶의 무게를 확인한다. 여기까지 여느 때와 흐름이 똑같다. 아마 5분 후도, 30분 후도, 어쩌면 1시간, 3시간 이후도 똑같겠지만.

책 한 권을 책장에서 꺼낸다. 음, 오늘은 나탈리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다. 뼛속에서 서늘함이 밀려올 것 같은데, 오늘도 30도 부근까지 올라간단다. 내 체중만큼 공기가 제법 무겁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이동한다. 오른쪽 어깨엔 가방이 왼쪽 어깨엔 아무것도 없다. 대신 왼손에는 아까 고른 나탈리의 책이 들려 있다. 굳이 가방에 넣어도 되는 걸 손으로 들고 간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와, 저 사람 책 좀 읽는 모양인걸, 요즘 종이책이라니 대단해’라고 생각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소 무겁기도 하고 거추장스럽기도 하지만 들고 간다. 이렇게라도 하면 버스에서든 지하철에서든 잠깐이라도 들여다볼 것이 아닌가. 단 5분 만이라도. 삶은 작은 희망 하나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모란역, 5번 출구, 새벽 5시 40분, 에스컬레이터 위에 오르면 저만치서 350번이 도망간다. 지난주도, 어제도, 오늘도 똑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매일 벌어질 수 있을까. 내 눈앞에서 똑같은 영화가 같은 시간에 재생되는 것이다.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곤, 나는 지나가버린 어느 계절, 그러니까 한창이었을지도 모를 어떤 순간을 회상한다. 나는 그렇게 매일 순간들을 보낸다. 이렇게 아침마다 속절없이 내 선택과는 전혀 상관없이 버스를 놓치듯, 나는 어떤 기로에서 무언가를 잃는다. 그리고 그 기로는 반으로 쩍 반으로 갈라지고 한쪽은 멀리멀리 달아나버린다. 다시는 잡을 수 없는 매일 사라지는 350번 버스처럼 그 순간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지 미쳐 깨닫기도 전에.

350번 버스는 사라진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체험 삶의 현장에서 사라지듯 살아진다. 사라지고 살아지는 것들, 모든 것의 총체적인 합, 그 합산의 결과는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가. 나는 목격한다. 빈틈없이 지나치는 소홀한 것들 보다 내가 조금 앞서나갔다면, 놓치지 않았을 그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며 내 인생의 한때, 절정이 되었을지도 모를 과거로.

나는 허망하게 그리고 허탈하게 지나가버린 버스의 뒷모양, 큼지막하게 찍힌 숫자를 크로스체크한다. 난 분명하게 놓쳤다. 길바닥에 흘려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모든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을 뿐, 그 아쉬움으로 길바닥에 포장해버린, 콘크리트였거나, 혹은 아스팔트였건, 어쩌면 흙길이 됐을지도 모르는 모든 가능성을 잠시 돌보곤, 현재로 돌아온다.

지금 이 순간, 아니 그 순간, 나는 어디에 있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길바닥에 서서, 모란역 5번 출구 앞에 서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진 각양각색의 표정과 그들의 삶의 양태를 지켜보며 그들이 오늘 꾸미게 될 나름의 멋진 순간을 공상해본다.

멋진 여름 날, 무서운 기세로 삶을 강타해버린 태풍 같은 여름 날, 그 여름날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무서울 기세로 아니 작년과는 다르게 이번 여름은 어쩌면 잔잔하게 다가올지도. 그러한 것을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기려나, 내 생애에서 가장 빛날지도 모르는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모양으로 변해가야 할 것이며 어디에 서식해야 할까.

그런 이상하게 생긴 고민과 몽롱해진 정신을 지워버리면 다음 버스, 말하자면 이미 떠나버린 350번 버스를 대체할 330번 버스가 찾아온다. 반갑게 문을 열고 내가 올라타기를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절정의 순간은 330번 버스처럼 어느 순간 나를 반긴다. 나는 그저 그 위에 무심하게 올라타면 되는 것이다.

빈자리가 나타나면 그 위에 편안하게 앉아버리거나 자리가 없다면 흔들흔들 버스와 같이 어지럽게 이동하는 것도 좋겠다. 약간 힘들고 많이 고되더라도 그 순간은 언젠가 사라질 테고, 안정과 평화로움이 곧 찾아와줄 테니까. 그렇게 자리에 앉게 되면 나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리라. 어두운 터널을 관통하며 빛의 시끄러운 환희를 맞이하고 교각 위를 지나치며 나의 높은 위치를 실감하리라. 그래서 나는 꽤 시원한 아침을 맞으며 어쩌면 어제와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미약하게 진보했음을 온몸으로 알아차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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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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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nflower 🌻

    0
    almost 3 years 전

    오늘 글이.참 좋네요~ 공심님^^ 놓쳐버린 버스 그리고 내게 다시 다가온 330번을 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항상 지금 여기에 살아라!!! 최선을 다해, 순간 순간을! 그런 메세지 같기도 하네요.

    ㄴ 답글 (1)
  • 옥돌여행

    0
    almost 3 years 전

    오늘이 아침이 전하는 삶의 무게를 체중계에서 느끼며 시작하시는군요.^^종이책 들고 걷는 지식인 공심님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되넉요.^^

    ㄴ 답글 (1)
  • 망망

    0
    almos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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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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