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 소녀들과 한자리에 앉아 피자와 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내 앞 옆으로 앉아있던 소녀들은 무슨 얘길 하는지 깔깔 웃기도 하며 즐거워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 몫의 음식을 열심히 먹었다. 나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애들이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외에 나가 있어서 그런 일을 겪는 게 아니었다.
그 친구들은 짧게는 몇 개월, 길면 십여 년 전에 한국으로 들어온 고려인 4세 친구들이었다. 그들에겐 러시아어가 모국어였고, 아직 한국어를 잘 모르는 친구도 많이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 소외감이 부끄럽고 당혹스러워졌다. 방금 내가 느꼈던 것을 사실 이 친구들은 한국에서 나보다 더 많이 느꼈을 감정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태어날 곳을 스스로 결정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자랄 곳을 정하는 일은 미성년자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 권리다. 성인이 되어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온 타지 생활도 전혀 쉽지 않은 데, 하물며 본인의 의지가 크게 반영되지 않았을 이주 생활은 어떤 느낌일까.
각자 떠나온 나라는 다르지만, 러시아어라는 공통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고려인 4세라는 점, 그것만으로 그 친구들 사이의 포옹에서 묻어나는 따뜻함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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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영화<브루클린>에서는 주인공이 아일랜드에서 미국 브루클린으로 이민한다. 그곳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고향에서의 부고를 듣고 급히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가게 되는 주인공에게 그의 연인은 “Home is home.”이라고 말한다. 금의환향했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온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어찌나 안도했던지. 그러면서도 우리의 주인공이 이 과정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지 나 홀로 셈해보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영어 선생님에게 들었던 하우스house와 홈home의 차이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우스는 물리적인 건물로써의 ‘집’을 의미하고, 홈은 그 이상의 어떤 정서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집’을 뜻한다고.
나는 결혼을 하며 난생처음 ‘하우스’가 생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선택한 사람과 만든 ‘홈’을 갖게 되기도 했다. 아마도 <브루클린>에서 연인이 주인공에게 했던 말의 의미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이 되는 것 같다. 영화 예고편을 보니 그 대사는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었다.
“여기가 네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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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고려인 청소년 친구들과 함께 1박 2일 캠프로 파주 임진각과 DMZ에 다녀왔다.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시간이었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뿌리를 지닌 민족이라는 이유,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이유만으로 고려인 4세 청소년들에게 남북통일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곳을 함께 다녀온 친구 중 아무도 대한민국 국적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 낯선 나라의 국적을 가진 고려인 친구들에게 과연 ‘남북통일’이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는 말이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남북의 평화통일을 기도하고 염원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건 매우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25 때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가정을 이뤘다. 두 분은 예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여전히 북에 내 먼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할 때가 있다.
친가 쪽 친척 중엔 국가에서 진행하는 이산가족 상봉이 있으면 꼬박꼬박 참여하시는 분이 계셨다. 중국 브로커에게 얼마쯤 주면 아직 북에 살아있는 혈육을 만나거나, 전화 통화라도 가능하다는 정보를 명절에 듣기도 했다. 아빠는 탈북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라면 괜히 과소비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생각해 보니 난 고등학생 때 황해도 군민 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통일은 나 개인의 가족사적 문제였고, 염원이었다.
그런 ‘통일’이었는데, 지금 저 멀리 고향을 떠나 남한에 와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고려인 4세대 청소년 친구들에게, 대체 무슨 근거로 통일을 얘기할 수 있을까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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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단하고 거창한 이념 때문이 아니라, 집.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필요한 집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했다. 남한의 사람도 북한의 사람도. 저 멀리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온 고려인 친구들에게도, 인천에서 광주까지 내려와 타지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겐 집, 홈이 필요하다.
홈은 단순 혈연관계로만, 가족이란 이름으로만, 그리고 같은 국적으로만 구성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서로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며, 감정을 존중하고, 인생의 고되고 즐거운 순간 모두를 함께 하기로 하는 좋은 관계. 그런 좋은 관계가 있는 ‘홈’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홈-리스’를 위해, ‘홈’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위해 가끔 기도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주 나에게 주어진 홈을 아끼고 가꾸며 살아가야지. 함께 산지 아직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은 나의 남편, 그리고 광주에 와서 알게 되고 조금씩 친해지고 있는 고려인 청소년 친구들. 그들과 조금 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해 보려 한다. 이곳이 나의 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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