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커다란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다. 할아버지는 바람대로 사투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잡고 뭍으로 다시 이동하지만,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청새치를 온통 뜯어 먹어 버린다. 할아버지에겐 청새치의 뼈만 남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돌아간다.
어릴 적 나는 이 이야기를 헤밍웨이가 대체 왜 썼는지 궁금했다. 바라던 물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상어 떼에 살을 다 뜯겼다. 노인은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단순하고도 의미 없는 이야기를 굳이 왜 썼을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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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이상하게도 점점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어려워졌다. 무엇을 써야 하나 고민하는 일이 잦아졌다. 분명 예전에는 이것도 저것도 쓸 것이 많았는데, 하고픈 얘기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게 갑자기 머릿속에서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할 이야기가 없다’가 아닌, ‘그건 의미가 없다’가 숨어 있었다. 정말 할 이야기가 없다면 할 이야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야기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가 없다는 생각엔 무엇이 의미 있는 것인지, 가치 있는 것인지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실은, 할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의미를 검증하라는 검열관이 언제부터인가 그 몸집을 자랑하며 크게 한자리 해 먹고 있던 것이다. 그 검열관 앞에선 무슨 이야기를 가져가 들이밀어도 쉽게 퇴짜맞고 말았다. 이건 너무 가벼워서, 저건 너무 색이 강렬해서. 아주 작고 사소한 트집이라도 그의 눈에 커다란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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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산티아고에게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 예전엔 알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생생하게 눈앞에 보였다. 청새치 뼈를 배에 달고 돌아온 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였으며, 무슨 가치였을까?
나에게는 이야기가 보였다. 그가 꿈꾸고 바라던 것을 이루고 돌아온 이야기.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가 남았다. 며칠 밤낮을 쏟아부었던 청새치와의 사투,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상어 떼와의 사투. 비록 그 과정을 통해 물질적으로 남은 것은 거대한 생선 뼈였지만 그에겐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누구의 인생이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사람에게도 인생의 불행이 찾아오곤 한다. 마치 산티아고가 잡은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고 다가왔던 상어 떼처럼,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며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다. 산티아고는 그 불행을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온 존재로, 정면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장렬하게 패배한다. 그러나 그는 승리한다. 왜냐하면 그 사건 자체를 소화해 낸 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래서 힘이 있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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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야기로 산다. 자신이 듣고 아는 이야기, 그러하다고 믿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살아간다.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잡은 이야기를 얻었다. 그는 훌륭한 어부의 이야기를 가지고 남은 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로 살아가고 있나. 또 어떤 이야기를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검열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누가 내 이야기를 의미 없다고 말하는가. 그건 마치 산티아고가 가져온 청새치 뼈를 무게 달아서 얼마로 바꿀 수 있는지 계산해 보는 일과 같았다. 이것은 얼마인가. 검열관은 내 이야기가 얼마짜리인지 늘 묻곤 했고, 나는 그 질문에 답하기가 곤란했다. 나의 이야기는, 굳이 돈으로 따지자면... 그러나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나의 이야기는 과연 무가치한가?
다시 한번, 내가 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돌아보았다.
세상을 둘러보면 수많은 이야기가 널려 있는데, 그중에 내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나의 이야기. 나라는 사람이 경험한 나만의 이야기. 그 누구도 나 대신 말할 수 없는 나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없다. 나의 이야기가 의미 있듯이, 너의 이야기도 의미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 나의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이야기를 찾아 읽는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너의 이야기를.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쓰고 읽는 사람으로, 비록 돈으로 쉽게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범주를 벗어나 이야기를 계속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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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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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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