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수필

[무구수필] 5월 3일

2024.05.31 | 조회 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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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아침부터 진하고 맑은 햇빛이 가득했다. 내일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날. 실질적인 여행은 오늘이 마지막인데 뭘 하면 좋지? 고민하다가 우에노 공원에 가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우에노역 한 정거장 전인 오카치마치역에 내렸다.

전철 안에서부터 역사 안팎으로 사람이 많았다. 관광객뿐 아니라 연휴를 즐기러 나온 현지인들이 많았다. 비행기 티켓을 끊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여행 일정이 일본의 골든 위크 연휴와 정확하게 겹친다는 사실을. 어쩐지, 티켓값이 다른 날에 비해 싸더라.

 

오카치마치역에서 우리가 바란 것은 거리에 늘어선 가게의 노상 좌석에 앉아 현지인 느낌을 내며 음식을 먹는 것이었는데, 이미 곳곳에 있는 음식점은 죄다 만석이었다. 수많은 사람 사이 틈을 비집고 안되는 일본어를 동원해 가며 기어코 착석할 만큼의 의지도, 힘도 없던 우리는 빠르게 마음을 결정했다. 큰길가로 나가서 가장 가까운 곳, 적당한 음식을 팔고 자리가 있는 가게라면 어디든 들어가서 점심을 해치우자고. 우리의 지금 목표는 식도락이 아닌 공원 방문이니까.

목표에 걸맞게 우에노역 건너편에서 적당한 맛과 가격의 텐동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적당히 점심 끼니를 하고는, 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뽑기 가게를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100엔을 지갑에서 세 개 꺼내 동전 구멍에 차례차례 넣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레버를 드르륵드르륵 돌리니 배출구로 낯익은 플라스틱 구슬 통이 톡 하고 나왔다. 마개를 돌려 열어보니 귀여운 오리 캐릭터 인형이 있었다.

 

고가도로 밑 횡단보도를 건너 상점 사이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니, 푸릇한 나무가 가득한 우에노 공원이었다. 공원 안의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곳곳엔 탁 트인 공간이 아닌데도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얇아 보이는 종이나 신문지 따위를 엉덩이 밑에 깔고, 간단한 과자나 안줏거리, 캔맥주와 음료, 간혹가다 한국어가 쓰여있는 소주병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한강공원에서 종종 봤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재밌었다.

발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니 이번에는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그 아래로 짧은 횡단보도와 동물원 개찰구, 그리고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을 향해 가는 작은 다리 위로 빽빽하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다리 난간을 따라 쭉 노점상 천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꺼려지면서도 나도 남들처럼 구경은 해보고 싶은 마음에, 그 다리 위로 발을 내디뎠다. 다코야키, 닭꼬치, 석쇠 구이 간식들부터, 한국의 10원빵과 거의 흡사한 10엔빵, 회오리 감자, 탕후루, 케밥까지. 한국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점들의 판매 품목과 가격들을 보고 우리는 눈으로만 실컷 구경하고 노점상 다리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사찰 뒤에는 오리배와 작은 보트를 탈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고, 이미 물 위에도 너무 많은 탈 것들이 수면 위에 떠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이 공원은 도심 한가운데 있다 보니 배를 타더라도 주변에 보이는 건 높다란 빌딩뿐일 텐데. 굳이 이런 데서 타야 하나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연휴라는 것이, 혹은 여행이 주는 무모하고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기분이 뭔지 알기에 납득이 되기도 했다.

, 그들이 기분 좋으면 됐지, 하는 마음으로 오리배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반대 방향에 있는 물풀이 무성한 연못가와 저 멀리 보이는 사람들, 내 옆을 스쳐 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말소리,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의 발걸음, 며칠 전 비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고 선선한 날씨,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있는 남편의 존재를 느끼며, 천천히 천천히 공원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며칠 뒤 부를 결혼식의 축가를 작은 소리로 부르며 걸었다.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못 알아 들을거라 생각하니 집 밖에서도 노래 부를 용기가 생겼다. 아님 너무 날씨가 좋아서 절로 흥이 오른 것일 수도 있다. 노래를 부르고,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공원을 구경하고, 자판기에서 뽑아둔 음료수를 마시기도 하며 공원을 작게 한 바퀴 돌았다.

 

공원을 둘러본 뒤 오후의 남은 시간은 긴자에 가볼 생각에 다시 전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공원의 출구 가까운 공터, 큰 나무 앞에서 어떤 사람이 작은 책상을 펼쳐두고 주사위와 컵 따위를 올려두고 사람들에게 뭐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마술쇼를 보여주는 사람인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재밌는 구경거리일 것 같아 멈춰서 그의 쇼를 지켜보았다. 그는 컵 안에 주사위를 순서대로 세워보겠다는 것 같았다. 그의 작은 무대를 둘러싼 청중은 겉으론 크게 호응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들 그가 움직이고 있는 손과 작은 소품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그가 대체 어떤 재미난 것을 보여주려나 싶어 잔뜩 집중해서 그의 손놀림을 지켜봤다. 그는 뭐라 뭐라 일본어로 말하더니 히얏- 하고 기합을 주곤 주사위를 안에 숨겨두었던 컵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 살짝 비뚜스름 하지만 주사위가 차곡차곡 올라가 있었다. , 보세요! 하는 듯한 그의 손짓에 청중은 떨떠름한 손뼉을 쳤다. 청중의 반응에 힘을 얻었는지, 그는 다시 한번 무엇인가 도전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뭔가 다른 몸짓으로 이리저리 손동작하고 다시 한번 기합 소리. 그리고 다시 컵을 들어 올렸는데, 이번에는 꽝이었다.

그가 먼저 난처하다는 목소리를 내며 급하게 소품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뭐야, 그냥 그런 실력이잖아, 싶었는지 사람들도 하나둘 그 자리를 벗어났다. 우리도 사람들처럼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러면서도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흘끗 쳐다보게 되었다. 그래도 다시 마술쇼를 하는 건가? 여전히 그의 작은 책 주위로 조금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인 갈 보여주겠다고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 일본어로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좀 웃기긴 하지만 재밌었어, 그치? 나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실력이 좋았다기보단 분위기가, 재밌었어.

좋은 날씨에 여유롭게 걷고, 노래도 부르고. 여행과 휴가, 연휴가 주는 무모하고도 비효율적인 기분을 잔뜩 느껴서인지 즐거웠다.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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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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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rgrace

    1
    5 months 전

    5월 3일이 어떤 날이었을지 상상하며 잘 읽었어요 :)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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